기업구조조정의 핵심인 반도체와 자동차빅딜(대규모 사업교환)이 여전히 안개속을 헤매고있다.『마라톤코스로 치면 이제 1㎞쯤 남겼다』던 반도체와 자동차 빅딜이 마냥 늦어지면서 재계 일각에선 벌써부터 「빅딜은 이미 물건너간 것」이라는 목소리가 나오고있다. 정부 고위관계자들도 『시간만 끌다가 흐지부지될 가능성도 배제할수 없다』고 우려하고 있다.
물론 다음달초 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의 정,재계 간담회를 앞두고 있어 재계가 이달안에 극적인 타결책을 내놓을 것이란 기대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빅딜 중재에 나선 전국경제인연합회 고위관계자조차 『자율적인 타결가능성이 점차 낮아지고있다』고 우려하는 실정이다.
자동차와 반도체 빅딜 왜 늦어지고 있나= 자동차 빅딜을 추진중인 삼성과 대우는 16일로 협상 100일을 넘겼다. 실날처럼 이어지던 공식협상은 이달들어 거의 중단된 상태다. 금융감독위원회가 거중조정에 나서고 있지만 진전이 없어보인다. 이헌재(李憲宰)금감위원장이 계속 『타결이 임박했다』고 희망의 메시지를 던지지만 주변에서 흘러나오는 얘기는 그리 밝지않다.
전경련 관계자는 『양 그룹은 물론 중재에 나선 전경련이나 정부도 지쳐있다』고 말했다. 빅딜 회의론이 고개를 드는 배경이다. 협상이 장기화되자 부산의 삼성자동차 공장은 휴업을 계속하고 있고 협력업체의 피해도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대우는 삼성자동차 SM5 계속생산에 따른 자금과 판매를 삼성이 맡아야 한다는 입장이고 삼성은 SM5 계속 생산을 결정할 권한과 판매문제는 대우의 몫이라는 원칙론을 고수하고있다.
이제 자동차협상후 전개될 예정이었던 대우전자 처리방향도 종잡을 수 없게됐다. 두 그룹은 부인하지만 「대우전자 독자생존설」이 갈수록 굳어지는 양상이다.
반도체는 상황이 더 안좋다. 현대와 LG는 LG반도체 인수대금에서 2조원이상의 현격한 인식차이를 보이고 있다. 대금지급을 현금으로 할 지, 통신관련사 지분으로 할 지도 논점으로 부각되지만 그보다는 LG반도체의 값어치가 얼마냐는 본질적인 문제에서부터 생각이 다르다. 가능한 적게 주려는 현대와 많이 받으려는 LG의 입장차는 아무리 협상을 해도 풀리지않고있다.
해결의 묘안이 없다 = 재계는 이달말부터 정·재계 간담회직전까지 4대 그룹 총수들이 직접 나서는 막판 협상이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하고있다. 金대통령이 누차 『5대 그룹은 약속을 지키라』고 촉구한 만큼 「구조조정」이라는 현안을 갖고 4개월여만에 마주대하는 자리에서 해답을 제시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빈 손」으로 청와대에 들어갈 수 없다는 현실론이다.
그러나 재계는 자동차나 반도체 빅딜을 둘러싸고 金대통령 취임 1주년 또는 지난 4일의 전경련 회장단 신임인사등 극적타결의 계기가 많았지만 모두 무산된 전례를 주목하고있다. 단 한번의 결정으로 수천억원, 많으면 수조원을 잃어버릴 수 있는 빅딜에 나서기엔 총수들도 무척 부담스럽다는게 해당 그룹 실무진의 얘기다.
재계는 이제 정부가 빅딜의 표면에 나서라고 주문하고 있다. 전경련 관계자는 『정부가 빅딜과 관련한 금융지원책을 과감히 내놓으면서 여건을 조성해주면 문제의 실마리가 풀리지않겠느냐』고 말했다. 해당 그룹들이 한 치도 손해를 안보려는 입장인 만큼 정부가 어느 정도 인센티브를 줄 차례가 아니냐는 설명이다.
그러나 정부의 역할은 다른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협상에 개입해 가격을 결정하는등 중요한 역할을 할 경우 나중에 후유증을 감당하기 어렵다. 국제적인 통상마찰을 불러올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한다.
재계는 빅딜의 본래취지가 과잉설비와 인력을 재조정하는데 있다면 현재의 반도체와 자동차 빅딜은 본궤도에서 벗어나있다고 분석하고있다. 정부 관계자도 『빅딜이 재벌들의 「잇속챙기기 무대」로 전락한 만큼 이젠 정부가 빅딜의 본래의미를 재정립하고 기본방향을 잡아줄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구조조정은 늦게 할수록 좋다」는 재계의 잘못된 믿음을 깨기 위해서도 정부가 분명한 메시지를 줄 시점이란 지적이다. 【손동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