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일본 증권거래등감시위원회로 메일 한 통이 날아왔다. "도시바 인프라 관련 사업의 회계처리에 부정행위가 있었다"는 내용이 담긴 이 메일을 시작으로 일본의 거대 제조업체 도시바는 몰락의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후 올 2월 위원회가 조사에 착수한 지 5개월여 만인 지난 20일 도시바가 7년간 전현직 사장 3명에 걸쳐 조직적인 회계부정을 저지른 사실이 만천하에 공개됐다. 도시바가 부정의 늪에 빠져 신뢰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된 배경에는 경영난에 직면한 기업이 빠지기 쉬운 '이익지상주의'와 상사의 뜻에 거역하지 못하는 상명하복식 기업풍토가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도시바 회계부정을 조사해온 제3자위원회가 20일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도시바는 2008회계연도(2008년 4월~2009년 3월)부터 지난해 말까지 총 1,562억엔(약 1조4,553억원)의 이익을 과대 계상했다. 이 기간 도시바가 발표한 세전순이익은 약 5,650억엔. 총이익의 30%가량은 회계부정으로 부풀려진 수치라는 얘기다. 보고서는 다나카 히사오 현 사장을 비롯해 전임 사장인 사사키 노리오 부회장, 전전 사장인 니시다 마쓰토시 고문까지 3대에 걸쳐 "최고경영자(CEO)가 포함된 조직적 관여가 있었다"고 밝혔다. 이들 전현직 사장은 모두 사임하게 됐다.
제3자위는 도시바가 회계부정의 늪에 빠져든 원인으로 경영자의 압력과 회사 전반에 번진 이익지상주의를 지목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21일 2008년 리먼브러더스 사태의 직격타로 7조엔에 달하던 매출액이 5조엔대로 주저앉은데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도시바의 핵심분야였던 원자력 사업이 얼어붙으며 당장 눈앞의 실적을 올리는 데 급급한 풍토가 회사 전반에 확산됐다고 지적했다.
특히 CEO들은 매월 자회사 사장 및 부문장들과의 월례회의에서 정상적인 영업 노력으로는 달성하기 어려운 수익개선 목표치를 제시하며 압력을 가했다. '상사의 뜻에 거역할 수 없는 기업풍토가 있었다'는 보고서의 지적대로 각 사업부문과 자회사들은 상부의 요구에 따르기 위해 회계부정으로 내몰렸다. 당초 내부고발과 달리 부정행위는 인프라 사업뿐 아니라 TV와 반도체·PC 등 각 분야에서 벌어졌다. 가령 2012년 당시 사사키 사장은 9월 월례회의에서 불과 3일 만에 PC사업의 영업이익을 120억엔 늘리라고 강하게 주문했으며 PC사업부는 이튿날 자회사를 통해 119억엔을 과대 상계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이러한 회계부정은 외부에 드러나기 어렵게 교묘한 수법으로 이뤄졌으며 내부통제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고 보고서는 설명했다. 도시바는 일찌감치 거버넌스 개혁을 통해 복수의 사외이사를 두는 등 '기업통치의 우등생'으로 인정받았으나 정작 외부의 '감시'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고 마이니치신문 등은 지적했다,
이번 사건으로 주주 신뢰와 기업 이미지에 큰 타격을 받은 도시바는 험난한 앞날을 맞게 됐다. 니혼게이자이는 증권거래등감시위원회가 도시바에 부과할 과징금이 2008년 IHI에 부과된 16억엔을 넘어 역대 최대 규모에 달할 가능성을 제기했다. 주주들로부터의 거액의 민사소송과 미국발 집단소송에 휘말릴 수도 있다.
도시바 사태가 일본 기업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사쿠마 마코토 아사히라이프애셋매니지먼트 최고투자책임자(CFO)는 "도시바 문제가 일본 주식 전반에 미칠 악영향은 제한적"이라면서도 "일본 기업의 개혁이 형식에 그친다면 해외 투자가들의 실망감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