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초 국내외 주요 석유 전문기관들이 유가 전망을 하면서 내놓은 최악의 시나리오는 배럴당 80달러선이었다. 산유국의 원유생산 및 소비국의 정제시설 부족이 계속되는데 전세계 석유 수요는 오히려 꾸준히 늘어나고 이란ㆍ이라크 등 중동 정세가 급속히 악화되는 등 온갖 악재들이 석유시장을 덮치면 세계 3대유종 중 가장 비싼 미국 서부 텍사스산중질유(WTI)의 최고가가 배럴당 80달러선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유가 100달러 시대 운운이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고 있다. ‘유가 100달러’란 유령은 좀처럼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계속 시장을 배회하고 있다. 석유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유령 출현의 배후에는 국제석유시장의 ‘투기세력’이 있다”고 주장한다. 투기세력이 유가를 결정하는 수급요인에 플러스 알파를 더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투기세력의 움직임과 그 규모는 항상 미궁 속에 있지만 그 존재 여부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전문가는 없다. 전문가들은 영국과 미국의 원유 선물(先物)시장에 유입된 투기자본을 고유가의 한 원인으로 지목하면서 “투기자본이 배럴당 적어도 4∼8달러를 가져가고 있다”고 단언한다. 최근 이란 핵문제와 나이지리아 정정(政情) 불안, 러시아의 가스 수출 축소 등 악재가 겹치자 투기세력이 또 다시 준동하고 있는 징후가 점점 뚜렷해지고 있다. 지난 23일 블룸버그통신 등 외신은 “뉴욕상업거래소(NYMEX)의 시간외거래에서 WTI 3월물 선물가격이 배럴당 70달러에 육박하는 69.20달러까지 오르면서 3월물 원유선물의 미결제약정이 급증하고 있다”며 “유가의 추가 상승을 노린 투기세력이 대거 원유 선물시장에 유입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24일 비슷한 의견을 내놓았다. NYMEX의 옵션과 선물을 포함한 순매수 포지션의 증가세가 올 들어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다는 것. 순매수 포지션이 많다는 얘기는 유가불안으로 향후 유가가 추가 상승할 것이라는 전망에 투자자들이 몰리고 있음을 뜻하는데, 통상 투기세력의 가세가 이를 부추긴다는 게 석유공사 애널리스트들의 전언이다. NYMEX의 순매수 포지션 계약은 유가가 안정을 찾은 지난해 10~11월 2만9,000건(1계약=1,000배럴)에 머물다 지난해 12월 5만4,300건으로 증가하더니 가장 최근인 지난주에는 6만2,900여건으로 늘어났다. 이 같은 분위기 탓인지 지난주 말 WTI 2010년 12월물이 사상 최고가로 치솟기도 했다. 5년 앞의 물량까지 오르는 것을 보면 투기세력들이 현물ㆍ선물을 따지지 않고 시장에 깊숙이 침투하고 있는 정황 증거로 판단할 수 있다. 석유 전문가들은 현재 선물시장 참가자의 30%가량을 투기꾼으로 보고 있다. 구자권 석유공사 해외조사팀장은 “투기세력의 규모와 유입 여부에 대해 단정지어 말할 수는 없다”면서도 “석유시장을 둘러싼 위험이 커지고 유가가 불안해지면서 투기세력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재경부의 한 국제금융 당국자는 “시장이 안정세를 보이면 투기세력이 활개치기 어렵고 수익을 내기도 쉽지 않다”며 “시장환경이 불안정할수록 헤지펀드 등 투기세력은 이익을 볼 기회가 늘어난다”고 설명했다. 결국 투기세력을 방지하는 길은 석유시장에 영향을 미치는 예측 불가능한 위험변수를 최소화하면서 원유수급 등 펀더멘털을 튼튼히 하는 길뿐이지만 시장은 정반대의 상황에 처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