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1월28일] 프란시스 드레이크


1596년 1월28일, 파나마 앞바다. 영국인 선원들이 논란 끝에 시신 하나를 바다에 던졌다. ‘바다의 사나이’,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의 최후다. 드레이크에게는 극단적으로 상반된 평가가 따라붙는다. 영국인들에게는 모험과 도전, 애국심의 상징이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간 큰 해적’일 뿐이다. 농가에서 태어났으나 바다와 인연을 맺었던 드레이크의 첫 사업은 노예무역. 친척인 존 호킨스 선장 밑에서 일을 배우던 중 스페인에 걸려 화물과 선원을 잃은 후부터 보복을 결심했다. 국가로부터 허가받은 해적, 즉 사략선장으로서 그의 정점은 1579년 3월 칠레 해역에서의 스페인 보물선 ‘카카푸에고’호 나포. 옮겨 싣는 데만 나흘이 걸린 은화 26톤과 금화 36㎏ 등을 빼앗은 드레이크는 선박을 되돌려주면서 안전통행증과 약탈한 물품의 명세서까지 발급해줬다. 다른 사략선에 다시 걸렸을 때 무사항해를 보장하고 스페인 정부로부터 선장이 화물을 착복했다고 추궁받을 것을 염려한 ‘배려’였다. 스페인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선택한 태평양 항로는 그에게 ‘두 번째 세계 일주자’ ‘자기 배로 세계를 돈 최초의 선장’(마젤란은 항해도중 사망)이라는 명예까지 안겨줬다. 보물을 가득 싣고 세계를 일주해 돌아온 그는 함선을 직접 방문한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까지 받았다. 동인도회사 설립 논의가 시작된 것도 그의 귀환 이후부터다. 폴리머스 시장과 하원의원으로도 재직했던 그는 영국 해군의 부사령관에 임명돼 스페인의 무적함대까지 궤멸(1588년)시켰다. 덕분에 영국은 해양강국으로서의 지위를 다졌다. 다른 나라에서 드레이크 같은 인물이 나오는 길을 원천봉쇄하고 싶었는지 영국은 훗날 해적행위를 엄금하는 국제조약 체결에 누구보다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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