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경제소사/8월26일] 크레시 전투 권홍우 편집위원 1만2,000명 대 4만명. 누구나 영국의 패배를 점쳤다. 프랑스군의 핵심은 귀족ㆍ기사로 구성된 중장갑 기병 1만2,500기. 영국군 전체를 웃돌았다. 용병인 제노바 석궁수도 8,000명이나 딸렸다. 압도적 우위를 지닌 프랑스군에게서 도망치던 영국 국왕 에드워드 3세는 단안을 내렸다. 구원군과의 합류를 포기하고 정면대결을 택한 것. 1346년 8월26일 크레시 부근의 언덕 위에 진을 친 영국군을 가장 먼저 공격한 부대는 제노바 석궁대. 프랑스는 자신만만했지만 영국은 석궁보다 발사속도가 빠르고 사거리도 긴 '웨일스 장궁(長弓)'이라는 비밀무기를 갖고 있었다. 석궁대가 붕괴하자 프랑스 귀족과 기사들은 말의 고삐를 당겼으나 결과는 마찬가지. 웨일스 장궁의 파괴력이 얼마나 강했는지 화살은 기사와 말을 동시에 꿰뚫었다. 오후4시부터 한밤중까지 15차례에 걸친 공격은 모두 무위로 그쳤다. 전사자 집계는 영국군 250여명에 프랑스군 1만여명. 보헤미아 왕 등 제후 12명을 포함, 기사 1,542명도 전사했다. 프랑스의 처참한 패배는 근세를 앞당겼다. 제후가 기사집단을 모아 비상시 국왕에게 바치는 영주제도의 군사적 효용가치가 사라진 자리를 저비용 상비군이 대신했다. 민간의 권리의식도 커졌다. 전쟁 비용을 대느라 세부담이 커진 농민들이 일으킨 프랑스의 자크리 폭동, 영국의 와트 테일러 반란 등 농민반란이 꼬리를 물었다. 100년 전쟁의 시발점 격인 크레시 전투를 야기한 것도 세금. 프랑스가 세금 징수를 늘리자 플랑드르 상인들이 영국을 부추긴 게 전쟁으로 번졌다. 초반전에 빛나는 승리를 거두던 영국은 결국 무너져 프랑스 내 모든 영토를 잃었다. 인구와 자원의 차이 탓이다. 자본의 힘이 초장기전의 승패를 결정한 것이다. 입력시간 : 2006/08/25 16: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