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인 지난해 9월28일, 홍콩 도심은 노란우산으로 가득 메워졌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홍콩 지식인과 일반 시민들로까지 확산되며 번져 나갔던 홍콩 '우산혁명'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홍콩 민주화시위 1주년 행사는 1년전과 비교하면 너무 초라했다. 학민사조(고교생 학생단체) 대표 조슈아 웡(황츠펑)은 홍콩 민주화 시위가 1회성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지만 1,000명을 갓 넘긴 사람만 모여들었을 뿐 밤이 되자 뿔뿔이 흩어지며 싱겁게 끝났다.
◇미완인가 실패인가= 경찰의 최루액을 우산으로 막으며 이뤄진 시위 탓에 '우산혁명'이라고 불린 홍콩민주화 시위는 지난해 9월28일부터 12월15일까지 79일 동안 이어졌다. 행정수반의 완전한 직선제를 요구하며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작됐던 시위는 지식인과 일반 서민들에게까지 확대되며 한때 홍콩 에드머럴티 지하철역을 중심으로 센트럴과 상업중심지인 몽콕을 마비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두 달이나 이어진 시위에도 중국 당국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최루액과 후추액을 발사한 강경 진압이 역효과를 거두자 진압도 느슨하게 풀었다. 시위대도 제풀에 지쳤다. 지난해 10월4일 20여 만 명에 달하던 던 시위대는 10월말 3,000명 안팎으로 줄었다.
표면적으로 우산혁명 이후 홍콩은 달라진게 없어 보인다. 시위 목표였던 행정수반 직선제도, 시위도중 내세웠던 런춘잉 행정장관의 퇴진도 이뤄진 게 없다. 하지만 홍콩 내에서는 여전히 실패가 아닌 미완의 혁명이라고 강조한다. 우산시위가 홍콩의 정체성을 강화하며 민주화의 토대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해 11월 홍콩중문대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자신을 '홍콩인'이라고 인식하는 응답자가 26.8%로 주권반환 이듬해인 1998년 이후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특히 1980년 이후 출생자는 4.3%만이 자신을 '중국인'으로 인식한다고 답했다. 청킴와 홍콩이공대 교수는 "(우산혁명은) 젊은 세대에게 정치적 계몽의 계기가 됐다"며 "비록 성과를 거두진 못했지만 홍콩 민주화의 미래를 보여준 것"이라고 말했다. 우산시위 이후 흩어졌던 홍콩내 민주세력들이 결집한 것도 성과로 꼽는다.
중국 당국이 애써 감추려고 하지만 우산시위는 중국 공산당이 가장 두려워하는 분리독립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올해 시짱(티베트) 자치구 50주년과 신장위구르 자치구 60주년을 맞아 시진핑 정부는 성대한 기념식을 열고 공산당 서열 4위인 위정성 정치협상회의 주석 등 최고지도부를 파견해 분리독립세력을 견제했다.
◇중국 경제둔화는 정치력의 약화= 행정수반 직선제가 기폭제가 됐지만 홍콩 민주화 시위의 배경에는 홍콩경제의 둔화와 불균형이 자리 잡고 이다. 홍콩 경제가 회복세로 돌아서지 않는다면 민주화 요구는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1997년 반환 이후 홍콩 경제는 중국의 성장에 밀렸다. 홍콩 경제가 중국 전체에 차지하는 비중은 반환 당시 17%에서 지난해 3%로 줄었다. 경제력 약화는 홍콩인들의 소외감으로 확대됐다. 중국의 경제성장 둔화에 직격탄을 입고 있는 것도 홍콩의 고민이다. 중국도 곤혹스러운 눈치다. 영국 가디언은 "차이나쇼크와 반부패 투쟁이 마카오를 그로기(groggy) 상태로 밀어 부쳤다"고 전했다. 11월 홍콩의 지방선거 결과도 중국을 고민스럽게 한다. 자칫 범민주 세력이 승리할 경우 홍콩의 거리는 다시 노란 우산에 덮일 가능성은 여전히 잠재돼 있는 셈이다.
/베이징=김현수특파원 hskim@sed.co.kr
◇미완인가 실패인가= 경찰의 최루액을 우산으로 막으며 이뤄진 시위 탓에 '우산혁명'이라고 불린 홍콩민주화 시위는 지난해 9월28일부터 12월15일까지 79일 동안 이어졌다. 행정수반의 완전한 직선제를 요구하며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작됐던 시위는 지식인과 일반 서민들에게까지 확대되며 한때 홍콩 에드머럴티 지하철역을 중심으로 센트럴과 상업중심지인 몽콕을 마비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두 달이나 이어진 시위에도 중국 당국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최루액과 후추액을 발사한 강경 진압이 역효과를 거두자 진압도 느슨하게 풀었다. 시위대도 제풀에 지쳤다. 지난해 10월4일 20여 만 명에 달하던 던 시위대는 10월말 3,000명 안팎으로 줄었다.
표면적으로 우산혁명 이후 홍콩은 달라진게 없어 보인다. 시위 목표였던 행정수반 직선제도, 시위도중 내세웠던 런춘잉 행정장관의 퇴진도 이뤄진 게 없다. 하지만 홍콩 내에서는 여전히 실패가 아닌 미완의 혁명이라고 강조한다. 우산시위가 홍콩의 정체성을 강화하며 민주화의 토대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해 11월 홍콩중문대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자신을 '홍콩인'이라고 인식하는 응답자가 26.8%로 주권반환 이듬해인 1998년 이후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특히 1980년 이후 출생자는 4.3%만이 자신을 '중국인'으로 인식한다고 답했다. 청킴와 홍콩이공대 교수는 "(우산혁명은) 젊은 세대에게 정치적 계몽의 계기가 됐다"며 "비록 성과를 거두진 못했지만 홍콩 민주화의 미래를 보여준 것"이라고 말했다. 우산시위 이후 흩어졌던 홍콩내 민주세력들이 결집한 것도 성과로 꼽는다.
중국 당국이 애써 감추려고 하지만 우산시위는 중국 공산당이 가장 두려워하는 분리독립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올해 시짱(티베트) 자치구 50주년과 신장위구르 자치구 60주년을 맞아 시진핑 정부는 성대한 기념식을 열고 공산당 서열 4위인 위정성 정치협상회의 주석 등 최고지도부를 파견해 분리독립세력을 견제했다.
◇중국 경제둔화는 정치력의 약화= 행정수반 직선제가 기폭제가 됐지만 홍콩 민주화 시위의 배경에는 홍콩경제의 둔화와 불균형이 자리 잡고 이다. 홍콩 경제가 회복세로 돌아서지 않는다면 민주화 요구는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1997년 반환 이후 홍콩 경제는 중국의 성장에 밀렸다. 홍콩 경제가 중국 전체에 차지하는 비중은 반환 당시 17%에서 지난해 3%로 줄었다. 경제력 약화는 홍콩인들의 소외감으로 확대됐다. 중국의 경제성장 둔화에 직격탄을 입고 있는 것도 홍콩의 고민이다. 중국도 곤혹스러운 눈치다. 영국 가디언은 "차이나쇼크와 반부패 투쟁이 마카오를 그로기(groggy) 상태로 밀어 부쳤다"고 전했다. 11월 홍콩의 지방선거 결과도 중국을 고민스럽게 한다. 자칫 범민주 세력이 승리할 경우 홍콩의 거리는 다시 노란 우산에 덮일 가능성은 여전히 잠재돼 있는 셈이다.
/베이징=김현수특파원 hskim@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