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 테러’ 이후 미국에서 급격히 확산됐던 이슬람 혐오주의에 경종을 울린 영화 ‘내 이름은 칸’에서 주인공 리즈반 칸(샤룩 칸)은 이슬람 경전인 쿠란의 이 구절을 인용한다. 그러면서 “9·11 테러의 무고한 죽음은 전 인류의 죽음과 같다”고 말하고 눈물을 떨군다.
#“무고한 한 사람의 죽음은 전 인류의 죽음”
칸의 슬픔은 13살짜리 아들 샘의 억울한 죽음 때문이다. 9·11 테러 이후 미국 전역에 이슬람에 대한 증오가 고조됐을 때 샘은 백인 아이들의 집단구타로 사망한다. 게다가 가해자들은 모두 자취를 감추고 유일한 증인마저 입을 닫아버린다. 샘의 엄마 만디라(까졸)는 오열하며 칸을 원망한다. “당신하고 재혼하지 않았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야. 샘에게 ‘칸’이란 이름을 갖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 무슬림이랑 결혼하는 게 아니었어, 가 버려!”
칸은 떠난다. 미국 대통령을 만나 “내 이름은 칸이고, 난 테러리스트가 아니에요”라고 말하기 위해서다. 사랑하는 아내 만디라가 억하심정으로 내뱉은 요구를 곧이곧대로 따른 것이다.
#‘이슬람공포증’ 때문에 아들 희생당해
칸은 천재적인 두뇌의 소유자이지만 자폐증의 일종인 ‘아스퍼거 신드롬’ 환자라 타인의 말을 있는 그대로 믿는 성향이 있다. 자신은 거짓말은 물론 농담조차 하지 못한다. 그 뿐 아니라 낯선 사람과 낯선 장소에 대해서는 극도의 두려움을 갖는다.
그러니 미국 대통령을 만나기까지의 길은 말할 수 없이 험난하다. 돈은 금세 떨어졌고 먹을 것도 부족하다. 게다가 칸의 ‘이슬람 행색’ 때문에 가는 곳마다 눈총이 따갑다. 눈 붙일 곳을 찾으려 해도 숙박업소에서 퇴짜 맞기 일쑤다. 심지어 공항 검색대에선 단지 무슬림이란 이유로 모욕적인 몸수색을 당하고 비행기를 놓친 일까지 있었다. 급기야 칸은 테러리스트로 몰려 수사당국에 의해 장기간 불법 구금 상태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한다. 그래도 미국 공권력은 아무런 사과도 보상도 없다.
#프랑스 등에서 반이슬람 범죄 폭증
‘11·13 파리 테러’ 이후 전 세계적으로 이슬람공포증(Islamophobia)이 확산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반이슬람 증오 범죄가 6~8배나 늘었다고 한다. 캐나다와 미국 등에서 무슬림을 겨냥한 공격이 그칠 줄 모르고, 인터넷에는 “무슬림 씨를 말려야 한다”는 식의 악성 댓글이 넘쳐나고 있다. 심지어 뉴욕에선 한 남성이 두 명의 무슬림 여성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너희들의 사원에 불을 지르겠다”고 위협한 일까지 발생했다. 한국에 거주하는 13만5,000명의 무슬림들 역시 이슬람에 대한 편견에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하지만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이며 테러리스트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알라의 계시를 담은 쿠란이나 예언자 무함마드의 언행록인 하디스엔 ‘생명 존중’의 가르침이 곳곳에 있으며 대다수 무슬림은 이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나만 옳다’는 확증편향은 지극히 위험
그런데도 이슬람공포증과 이슬람에 대한 공격이 거세지는 것은 행동경제학에서 말하는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과 관련이 있다. 확증편향은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정보는 받아들이고 신념과 일치하지 않는 정보는 무시하는 경향이다. 그러니까 ‘무슬림=테러리스트’라는 편향된 믿음이 편향된 정보만 받아들이게 하고, 결과적으로 이슬람공포증을 키우고 있는 셈이다.
확증편향은 왜 생기는 걸까? ‘자신의 생각이 맞기를 바라는’ 인류 보편의 심리에서 기인한다고 학자들은 설명한다.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받고 싶은 나머지 주관적이고 감정적이며 편향된 시각에 치우치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 에머리대학의 드루 웨스턴 교수는 확증편향이 무의식적인 현상이며 정서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을 실험을 통해 밝혀냈다. 만약 한 나라와 기업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대통령이나 최고경영자(CEO)가 확증편향에 사로잡혀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은 배제하고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판단을 일삼는다면 어떻겠는가. 그래서 확증편향은 지극히 위험하다.
#이슬람 가르침은 증오 아니라 사랑
그래도 프랑스엔 ‘톨레랑스(관용)’가 살아있다. 파리 테러 이후임에도 불구하고 한 무슬림 청년이 파리 시내에서 “나는 테러범이 아니다”라며 프리허그에 나서자 적지 않은 시민들이 호응했다고 한다. 르몽드의 기사에도 울림이 있다. “(테러리스트들은) 유대인·기독교인·무슬림은 물론 남성과 여성이 서로 어울리며 살아가던 공간을 겨냥했다”고 썼다.
기독교나 불교 등 다른 종교들이 그렇듯 이슬람의 가르침 또한 증오나 전쟁이 아니라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더욱 분명한 것은 “좋은 행동을 하면 좋은 사람이고, 나쁜 행동을 하면 나쁜 사람”이다. 영화에서 칸이 거듭거듭 말했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