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이들은 내가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한 것을 두고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던 나의 결정적 실패라고 할지 모르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낙선이라는 쓰라린 아픔도 맛봤고 보복 차원의 압력을 수없이 받았으나 내가 실패한 것이 아니라 YS를 뽑았던 국민의 실패이며 동시에 나라를 거덜 낸 YS의 실패다. 다만 내가 대통령 선거에 도전장을 내밀었고 거기에서 떨어졌을 뿐이다. 따라서 내게는 후회할 일도 없다."
생전의 정주영 명예회장은 대권 도전과 실패를 담담하게 되돌아봤으나 당시 그의 도전은 상상 이상으로 무서운 후과(後果)를 안겼다. 188만표를 얻어 16.3%로 낙선한 정 회장의 숨통을 조여온 것은 국세청을 동원한 현대그룹 계열사들의 고강도 세무조사였다. 이뿐 아니라 정 회장 개인에게도 선거법 위반 및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위반 등의 법률적 멍에가 씌워졌다. YS정부는 수사를 가속화하며 정 회장을 사실상 '독재에 부역한 기업인'이라는 이미지에 가뒀다. 압력과 흑색선전에 가까운 치욕을 견디지 못한 아산은 1993년 2월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통일국민당사를 폐쇄해 결국 그의 정치적 제3지대를 위한 실험은 실패하고 말았다. 아산의 통일국민당 관계자 중 일부는 후일 김종필 국무총리의 '자유민주연합'에 합류하기도 했다.
사실 정주영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자기중심주의를 매우 싫어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992년 통일국민당을 창당하며 김영삼에게 정면도전을 선언한 것도 같은 이유다. 아산의 정치는 개발연대 무렵 국가의 부흥을 책임진 산업화 세력이 다시 전면에 나서는 것이어서 많은 이들에게 향수와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는 데 부분적으로나마 성공했다.
당시 정주영 국민당 후보는 반값아파트 공급 외에 5년 내 개인소득 2만달러, 5년 내 주택보급률 100% 달성 등을 내세우며 한국 경제 도약을 위한 공약을 강조한 바 있다. 특히 '집권 내 국제수지 300억달러 흑자' 공약은 비현실적 수치라며 민자당·민주당의 집중공격 대상이 되기도 했다. 국민당은 제조업 국제경쟁력 강화나 산업구조 고도화 같은 경제의 뿌리를 튼튼히 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반박했다.
파격에 가까웠던 정주영의 경제 살리기 공약이 다시 조명된 것은 1997년. 그해 12월 한국에 몰아닥친 외환위기의 와중에서도 현대그룹은 부도 처리된 기아자동차 인수, 금강산관광 사업 성사 등으로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국민들 사이에 '경제를 잘 아는 대통령'의 필요성을 싹 틔운 사건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