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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 남한산성, 어둠이 내린 남한산성…'불빛 바다'가 펼쳐졌다

깊어진 가을밤 산성 서문 오르자

[관광2면] 남한산성=서울 야경
남한산성 서문에서 바라본 잠실의 야경. 남한산성에서 본 서울의 밤 풍경은 조용하고 시크한 도회의 처녀 같은 광채를 발산하고 있었다.
[관광2면] 남한산성=북문
남한산성 북문.
[관광2면] 남한산성=수어장대
수어장대는 남한산성을 축조할 때 지은 4개의 수어장대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로 수어청의 장관(將官)들이 군사를 지휘하던 곳이다.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죽어서 아름다울 것인가, 살아서 더러울 것인가. "쓰러진 왕조의 들판에도 대의는 꽃처럼 피어날 것"이라며 결사항쟁을 고집한 척화파 김상헌, "역적이라는 말을 들을지언정 삶의 영원성이 더 가치 있다"고 주장한 주화파 최명길, 그 둘 사이에서 번민을 거듭하며 결단을 미루는 임금 인조. 그리고 전시총사령관인 영의정 김류의 복심을 숨긴 좌고우면, 산성의 방어를 책임진 수어사 이시백의 기상은 남한산성의 아수라를 한층 비극적으로 형상화한다…' 2007년 작가 김훈이 펴낸 소설 '남한산성'의 서평이다. 김훈은 1636년 경기도 광주의 산성 안에서 일어났던 인간군상의 갈등과 고뇌를 유려한 문장으로 그려냈다. 김훈이 소설을 펴낸 후 7년이 흐른 지난해 남한산성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고 또 한 해가 흘러 기자는 남한산성을 찾았다. 능욕의 현장은 역사적 유산으로 거듭났고 햇볕이 좋은 가을날, 원색의 등산복을 입은 관광객들은 400년 전 인조와 성안에서 항쟁하던 민초들의 자취를 찾아 성곽길을 걷고 있었다.

◇남한산성의 야경=남한산성은 성 자체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만큼 사료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유적이다. 성의 아름다움을 보려면 당연히 낮에 와야 하지만 산성 서문에서 내려다보는 잠실 쪽의 야경 역시 압권이다.

야경을 보기 위해 기자가 남한산성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9시. 한낮에 오가던 관광객들은 자취를 감추고 이따금씩 헤드랜턴을 준비한 등산객들의 발길만 이어지고 있었다. 기온도 뚝 떨어져 옷깃을 파고드는 바람이 차가웠다.

어둠이 내린 국청사를 지나 남한산성의 서문을 통과하니 문루에 세워 놓은 깃발들이 바람을 못 이겨 펄럭이고 있었다. 성문을 나와 50m쯤 남쪽으로 향하자 나무에 가리지 않아 전망이 탁 트인 포인트가 나타났다. 북쪽을 바라보니 발아래로 잠실 벌의 야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잠실의 야경을 보는 순간 중국 상하이의 야경이 떠올랐다. 상하이의 가이드들은 니콘이나 삼성 같은 다국적 기업들의 네온사인이 남중국의 밤하늘을 밝히고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는 듯했지만 기자의 눈에는 번잡스럽고 어수선할 뿐이었다. 그에 비해 남한산성에서 본 서울의 밤 풍경은 조용하고 시크한 도회의 처녀 같은 광채를 발산하고 있었다.

◇낮에 본 남한산성=국가사적 57호인 남한산성은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위치한다. 다음 날 찾은 남한산성은 이른 아침이었음에도 알록달록한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남한산성 탐방코스는 다양하지만 행궁을 둘러보고 북문(전승문)까지 올라간 후 방향을 왼쪽으로 틀어 북장대터→ 연주봉→서문→수어장대→청량당을 거쳐 남문 주차장으로 내려오면 1시간30분쯤 소요된다. 남한산성은 성벽의 주봉인 청량산(497.9m)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연주봉(467.6m), 동쪽으로 망월봉(502m)과 벌봉(515m), 남쪽으로 또 몇 개의 봉우리를 연결해 축조됐다.

단체여행객들을 따라 북문 밖으로 나가보니 내려가는 길의 경사가 가팔랐다. 해설사는 "성 내부는 경사가 완만하고 고도 350m 내외의 구릉성 분지인데다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는 천혜의 요충지로 외침에 정복당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천혜의 요새라면 인조는 왜 산성을 버리고 나와 삼전도 땅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항복했는지 대답 없는 남한산성은 북쪽으로 한강을 바라보며 묵묵히 서 있을 따름이었다.

◇행궁=남한산성 행궁은 전쟁 중이나 내란 등 유사시 후방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한양 도성 궁궐을 대신할 피난처로 사용하기 위해 조선 인조4년(1626)에 축조된 건물이다. 정무시설과 다른 행궁에는 없는 종묘사직 위패 봉안건물을 갖추고 있어 조선시대의 행궁제도를 살필 수 있다.

1999년부터 발굴조사를 실시, 상궐·좌전이 복원됐으며 일부 건물지에서 초대형 기와 등 다량의 유물이 출토된 유적이다. 자료에 따르면 당시 행궁에는 내행전인 상궐과 좌우 부속건물, 익랑 등 72칸 반, 상궐의 삼문 바깥에 외행전인 하궐과 응청문, 내삼문 등 154칸이 있었고 행전의 동편에는 객사인 인화관이 있었다.

"인조가 행전에 머물렀으며 숙종과 영조, 정조가 영릉 참배시 이곳에 머물렀고 유수의 아문이 있는 곳이 아니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처음에는 역대 왕들이 실제로 머물렀던 곳이었지만 후일 유수의 치소(治所)로 사용됐음을 알 수 있다.

/글·사진(경기도 광주)=우현석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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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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