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년. 식빵의 나이다. 당연히 의문이 들만 하다. 식빵의 역사가 고작 100년도 안됐다니! 인류가 원시적인 빵을 먹기 시작한 추정 시기가 약 3만년전. 고대 이집트부터는 자연 효모를 이용한 발효 빵을 먹었다고 하는데…. 맞다. 빵의 역사는 유구하다. 그러나 우리가 먹은 형태의 식빵은 역사가 짧다. 1928년 미국 미주리주에서 ‘칠리코스 제빵회사’가 내놓은 ‘썰린 빵(sliced bread)’이 효시다.
그렇다면 그 전까지는 ‘썰린 빵’이 없었을까. 그랬다. 판매용 빵도 덩어리(loaf)째로 팔렸다. 써는 것은 가정의 몫. 카드놀이에 정신이 팔려 식빵 조각에 야채와 고기를 넣은 간편식 ‘샌드위치’를 개발했다는 영국 샌드위치 백작(1718~1792)의 요리사도 덩어리 빵을 따로 썰었다. 냉장 시설이 변변치 않아 신선도 유지를 위해서였는지 빵을 나눈다는 발상 조차 하지 못했다.
‘식빵을 썰어서 팔자’는 아이디어가 나오고 실행되기까지는 적어도 수천년의 세월이 걸렸다는 얘기다. ‘썰린 빵’이 얼마나 획기적이었는지 영어에는 이런 표현이 있다. ‘the best(greatest) thing since sliced bread.’ ‘최고’를 뜻하는 관용구다. 직역하면 ‘썰린 빵 이후에 가장 뛰어난’이라는 뜻이다. 사전에는 이 표현이 1930년대부터 올랐다.
고대 이집트인부터 20세기 초까지 수천년 세월의 고정 관념을 깬 인물은 보석상 출신 오토 로웨더(Otto Rohwedder). 1880년 독일계 이주민의 후손으로 태어난 그는 보석 가게의 견습공부터 시작해 전문대학에서 광학을 전공하며 보석상의 길을 걸었다. 15년 동안 착실하게 사업장을 꾸려 보석가공을 위한 도구를 직접 만들어가며 가게를 3개로 늘려 나가던 그는 갑자기 사업을 접었다.
‘미리 썰어져 있는 빵을 만드는 기계를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실행하기 위해서다. 아이디어는 아내의 불평에서 나왔다. 일정한 두께로 썰기도 불편하고 빵칼이 잘 들지 않으면 빵이 쉽게 뭉개진다는 사실에서 착상을 얻은 것이다. 로웨더는 주도면밀했다. 이상적인 빵의 두께를 알아보기 위해 지역 신문에 광고를 내서 주부 3만여명의 의견까지 모았다.
시장조사까지 마친 로웨더는 1916년 보석상점을 모두 처분하고 ‘세인트 조셉시’ 외곽에 창고를 얻어 공장을 지었다. 기술적 난관을 극복해가며 첫 기계가 완성되던 즈음인 1917년, 로웨더에게 불행이 닥쳤다. 화재로 공장이 전소하면서 어렵게 개발한 기계는 물론 수천장의 수정 설계도면까지 불타버렸다.
로웨더는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주식거래 중개인으로 일하며 생활비와 재기 자금을 벌었다. 10년 세월이 흐른 뒤 로웨더는 두 번째 기계를 만들어냈다. 개발의 가장 큰 난관은 썰린 빵의 형태 유지. 모양과 신선도 유지를 위해 썰린 빵들을 고정시키는 방법이 마땅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가는 핀으로 고정했으나 기름 종이에 싸는 방법으로 대신했다.
완전한 기계를 만들었어도 정작 판로는 없었다. 몇 달을 고생한 뒤 나타난 최초 구매자는 로웨더의 친구였던 제빵업자 프랭크 벤치. 거의 망해가던 벤치는 친구라도 돕자는 생각에 기계를 구입해 1928년7월7일 최초의 슬라이스 식빵을 선보였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주부들의 호응과 지역 언론의 찬사 속에 매출이 불과 보름 새 두 배나 늘었다. 로웨더에게는 주문이 밀려들었다.
1930년에는 미국 전역에서 썰린 빵의 판매가 덩어리 빵을 앞섰다. 1933년에는 유명 제빵업자들이 모두 로웨더의 기계를 구입하고 식빵시장의 80%를 썰린 빵이 차지했다. 성공에 만족한 로웨더는 특허권을 넘긴 회사의 세일즈 담당 부사장을 맡아 17년을 일한 뒤 71세에 은퇴했다. 그는 여유로운 여생을 즐기다 은퇴 9년 뒤인 1960년 80세 나이에 눈을 감았다.
로웨더가 현역 부사장으로 일하던 1943년 1월 썰린 빵은 위기를 맞았다. 전시 식품청장을 겸임하던 미국 농무부 장관이 전시 물자절약을 이유로 썰린 빵의 생산과 판매를 금지한 탓이다. 미국 정부는 두 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 빵의 포장에 쓰이는 기름 종이가 군수물자다. 두 번째, 식빵을 자르는 칼날 제작에 들어가는 쇠 한 조각도 아껴서 무기를 만들어야 한다. 처음에는 먹혔지만 곧 반발이 뒤따랐다.
전시 통제에 잘 따랐던 미국 주부들은 불필요한 행정 규제이며 지나친 간섭이라고 들고 일어났다. 뉴욕시는 기존에 빵 써는 기계를 갖고 있는 제빵업체나 제과점은 그대로 사용해도 된다는 조례를 발표했으나 이번에는 전시식품청이 신규업체에 대한 불공정에 해당된다며 맞섰다. 결국 논란 끝에 농무부는 손을 들고 말았다. ‘판매 금지 조치가 기대만큼의 효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빵 포장용 기름 종이의 생산도 충분하다’라는 이유를 달았다.
전쟁이 빚은 해프닝인 썰린 빵 금지령이 지속됐다면 식빵의 형태가 지금과 달라졌을까. 매일 같이 식탁에 오르는 식빵에는 단순하지만 기발한 착상과 정부의 책상머리 행정, 현명한 소비자의 역사가 뒤섞여 있다. 창조경제는 구호로 창조되는 게 아니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