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최대 경제 블록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타결은 글로벌 통상의 무게중심이 양자 자유무역협정(FTA)에서 다자 FTA로 바뀌고 있음을 보여줬다. 글로벌 통상 환경의 급변으로 우리 수출 전략에도 변화가 불가피해졌다. 지난 10년간 11개의 FTA 발효로 전 세계 곳곳에 무관세 고속도로를 깔아놓는 데 성공했지만 TPP 창립 회원국에서 제외됨에 따라 앞으로 수출 경쟁에서도 난관이 예상된다. TPP가 발효되면 우리와 경합 품목이 많은 일본이 미국 시장에서 관세혜택을 받게 되고 역내 회원국에 적용되는 누적 원산지 규정 또한 우리에게 악재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정부가 한중일 정상회담에서 한중일 FTA와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등 다자간 FTA 협상에 가속페달을 밟자는 목소리를 높인 데는 이런 배경이 자리한다.
TPP 발효는 FTA로 제2의 수출 시장인 미국에서 힘겨운 경쟁을 예고하고 있다. 한국은 2012년 한미 FTA 발효로 대미 자동차 수출이 매년 20% 가까이 늘었고 자동차부품 수출도 덩달아 증가했다. 하지만 TPP가 발효되면 일본이 미국 시장에서 우리와 동등한 조건으로 맞서게 된다. 당장 일본 자동차부품 가운데 80%가 관세가 사라지고 비디오카메라·플라스틱·화학섬유·공작기계 등도 즉시 또는 발효 5년 안에 관세가 철폐된다. 일본 제품과 경쟁이 더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글로벌 역내 분업체계의 재편도 가속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TPP는 12개 회원 국가에서 조달한 원재료가 일정 비율 이상이면 역내 산으로 인정하고 관세혜택을 준다. 이른바 누적 원산지 규정이다. 이에 따라 TPP 가입국 간 '원재료-중간재-완성품'으로 이어지는 역내 분업체계가 만들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는 한국이 지난 10년간 발달시켜놓은 양자 FTA 망을 뛰어넘는다. 심지어 TPP가 가입국들은 협정 발효 후 원산지혜택에 따라 한국산 소재부품 대신 일본산을 사용해 완제품을 만드는 쪽으로 분업체계가 전환할 수 있다. TPP가 타결된 후 베트남 현지 미국 업체에 직물을 공급하기 위해 중국과 인도업체가 생산라인 이전을 고민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제현정 국제무역연구원 수석연구원은 "TPP 타결로 글로벌 기업은 인건비가 싸고 수출 관세 혜택을 받는 베트남에 몰려드는 새로운 형태의 가치사슬이 형성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TPP에 뒤처진 한국이 중국 주도의 다자간 FTA인 RCEP 협상의 속도를 높여야 한다는 지적이다. 한중일과 인도를 포함해 16개국이 포진해 있는 RCEP 역시 누적원산지 적용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한국은 RCEP이 타결되면 누적 원산지를 이용해 중국 시장을 발판 삼아 역내 국가에 관세혜택을 받으며 수출하는 길이 열리게 된다. RCEP에는 일본도 참여한다. RCEP 가입국들과 다자 협상을 통해 일본의 공산품 개방 요구를 어느 정도 막아 놓으면 앞으로 TPP 가입 때 일본의 개방 공세를 방어하는 데 낫다는 관측이다. 김수동 산업연구원 박사는 "최고의 시나리오는 RCEP이 타결되고 TPP에도 가입하는 것"이라며 "일본을 묶어두기 위해서는 한중일 FTA와 RCEP에서 일본의 공세를 최대한 막아놔야 한다"고 말했다./세종=구경우기자 bluesquare@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