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지난달 경영쇄신안을 발표하면서 ‘비전 2020(2020년까지 매출 200조원 달성해 아시아 톱 10 기업으로 도약)’을 재조정하겠다고 선언했다.
정책본부장(부회장)을 맡고 있던 지난 2009년 본인이 주도해 마련했던 그룹의 장기 비전을 스스로 거둬들인 것이다. 롯데의 한 관계자는 “양적 성장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협력사와 갈등을 빚는 등 많은 부작용이 있어 앞으로 질적 성장을 최우선 목표로 삼겠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삼성 등 주요 기업들이 지난 6~7년 전부터 앞다퉈 내놓았던 ‘비전 2020’이 흔들리고 있다. 경기 침체와 같은 대외적 요인에 더해 품질관리 실패 등의 악재가 겹치고 여기에 대통령 선거와 같은 정치적 불확실성이 맞물리면서 상당수 기업의 장기 비전 달성이 어려워진 탓이다.
재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31일 “현시점에서 주요 기업의 비전 2020을 점검해보면 달성률이 10%에 미치지 못하는 곳이 대부분”이라며 “기업들이 장기 비전에 사회적 책임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담지 못하고 있는 점도 개선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지적했다.
◇옛 성장모델 답습해 한계=현재 대다수 기업이 채택한 비전 2020의 가장 큰 문제점은 과거 고도성장 시기의 성장 모델을 답습하고 있다는 점이다. ‘패스트 팔로어’ 전략으로 선두를 추격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이후 새로운 성장동력을 발굴하지 못해 성장이 제자리걸음하고 있는 것이다.
오는 2020년까지 매출 4,000억달러(약 456조원)를 달성하겠다고 2009년 선포한 삼성전자가 대표적이다.
삼성은 1999년 최초로 미래비전을 선포하고 이후 10년 동안 매년 평균 15%에 달하는 폭발적인 성장세를 유지하며 글로벌 정보기술(IT) 업계의 선두기업으로 올라섰다. 하지만 2010년대 들어 사정이 달라졌다. 세계적인 저성장 기조 속에 삼성 같은 덩치의 기업이 매년 두자릿수의 성장률을 기록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비전 2020은 이건희 회장이 최종 승인한 작품이라 삼성도 공식적으로 포기를 선언할 수 없지만 내부에서는 경영계획을 짤 때 장기 목표로 반영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삼성전자는 지난해 펴낸 지속성장가능보고서에 실린 권오현 회장의 인사말에서 처음으로 ‘비전 2020을 달성’이라는 문구를 삭제했다.
삼성물산 역시 지난해 옛 제일모직과 합병하면서 2020년 매출 60조원, 영업이익 4조원 달성이라는 장기 비전을 내놓았으나 올해 상반기 기준 매출은 13조5,377억원에 그쳤고 영업이익은 적자로 전환했다.
삼성SDS는 2015년 5년 뒤 매출 20조원을 달성한다는 내용의 비전 2020을 내놓았으나 최근 주력 사업 부문인 물류BPO(업무처리아웃소싱)에 대한 분할 검토 작업에 착수해 역시 목표 달성이 어려워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현대자동차도 올해 연간 판매량이 당초 목표했던 813만대(현대차 501만대, 기아차 312만대)에 미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지난달까지 두 회사가 판매한 차량은 561만8,800여대로 목표보다 251만여대 부족하다.
현대차로서는 조기에 1,000만대 판매 시대를 열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지만 여러 여건상 내부 목표로 삼았던 것보다 늦어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장기 비전 대전환 나서야=기업의 최고경영자(CEO)들도 기업의 10년 뒤 미래를 정확히 그려내기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당장 내년 실적을 맞추기도 어려운데 10년 뒤 성적을 내다보는 것은 ‘신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달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주최한 SK CEO 세미나에서는 “실적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환율과 유가는 인간의 힘으로 예측할 수 없는데 경영 계획을 어떻게 짜야 하는가”라는 화두를 두고 CEO들 사이에서 난상 토론이 벌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올해는 장기 비전은 물론 내년도 경영계획조차 짜기 어렵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미국 대선 판도와 금리 향방을 예측하기 어려운 상태에서 국내 정치마저 ‘최순실 게이트’ 속으로 빨려 들어가 거시 경제 전망을 내놓는 게 무의미한 수준이라는 것이다. 현재는 잠잠하지만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Brexit)도 이후 커다란 충격파를 가지고 올 이벤트로 꼽힌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매년 자동차 판매량 목표치를 공개하는 현대자동차 그룹의 경우 올해도 예측이 빗나갈 것으로 보인다”며 “각 기업들이 숫자가 아닌 미래의 먹을거리를 발굴하는 형태로 장단기 비전을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