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의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결정에 외압 의혹이 불거지면서 사태 재발을 막기 위한 법안들이 경쟁적으로 발의되고 있다. 하지만 법안을 보면 정부와 청와대 등 외풍에 취약한 현 기금운용체계를 전면 개편하기보다는 제 밥그릇 챙기기나 땜질식 처방에 그쳐 600조원 노후자산을 굴리는 국민연금을 누더기로 만들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금융위원장을 역임한 전광우 전 국민연금 이사장은 “기금운용의 전문성과 독립성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국민연금의 거버넌스를 근본적으로 개혁하지 않고서는 모든 논의는 공염불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23일 국회에 따르면 국민연금에 대한 검찰 및 특검의 수사가 본격화한 지난해 11월 이후 국민연금법 일부 개정안 4건이 국회에 발의됐다. 각론은 다르지만 큰 틀에서는 △이사장·기금이사 임명절차 △기금의 운용·관리책임 △전문위원회의 운용 등을 주로 다루고 있다. 최근 정부가 특검 수사 결과를 지켜본 뒤 기금운용체계 개편을 시사하면서 이들 법안은 더욱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4개 법안을 뜯어보면 현실에 맞지 않는 조항이 있거나 사태의 근본 원인을 제대로 짚지 못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제윤경 더불어 민주당 의원안은 이사장과 기금이사의 국회 인사청문회 절차를 규정했다. 같은 당 권미혁 의원안은 기금이사의 추천권을 국회 등이 추천한 인사들로 구성된 기금이사추천위가 갖도록 했다. 국민연금이 외풍에 흔들렸던 일차적 원인을 외부 입김에 취약한 인사권에서 찾은 것이다.
하지만 공공기관인 국민연금의 지위는 그대로 둔 채 수장에 대해서만 별도 청문회를 도입하는 것은 지난해 말 기준 119곳에 이르는 정부 산하 공기업 및 준정부 기관과 형평성을 고려할 때 현실성이 떨어진다. 현재 공단 비상임 이사들로 구성된 추천위가 가진 기금이사 후보에 대한 추천권을 국회 등이 추천한 위원회가 하도록 바꾼 것도 결국 국회가 숟가락을 얹으려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기금이사에게 상업상 손해배상 의무를 준용하도록 한 채이배 국민의당 의원법안은 투자 판단에 법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과잉입법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뜨거운 감자’인 의결권전문위의 역할과 위상에 대해서도 겉핥기식 대응이 주를 이룬다. 김승희 새누리당 의원안은 자문기구 성격인 의결권위를 법적 기구인 ‘주주권행사위원회’로 격상하고 의결권 행사 때 사전 승인을 받도록 했다. 국민연금 사정에 밝은 관계자는 “의결권위가 어떤 안건을 다룰 것인지 명확하게 구분 짓는 것이 더 중요하다”며 “위상 강화는 손쉬운 해결책처럼 보이지만 옥상옥에 그칠 위험이 높다”고 지적했다.
일각에서는 기금본부에 대해 책임만 강요할 것이 아니라 권한도 함께 이양하는 방식으로 조직을 전면 개편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공단 산하에 있는 기금본부를 ‘기금공사’ 형태로 격상하고 기금운용을 총괄하는 사장(현 기금본부장)을 두자는 것이다. 그 아래 각 전문위의 의견을 수렴하고 의사결정을 하는 부사장직을 두고 이들이 투자 부문별 기금운용책임자(CIO)를 지휘하는 형태다. 전 전 이사장은 “비전문가로 구성된 현 기금위를 한은 금통위처럼 전문가 집단으로 바꾸되 국민연금의 각 대표가 추천하도록 하면 될 것”이라며 “그렇게 되면 기금의 전문성이 올라가고 외풍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민우·박호현기자 ingaghi@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