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무엇을 위한 화폐개혁이었나

무엇을 위한 화폐개혁이었나



559억원→1조원. 한국전쟁 발발 2년 반 동안 한국은행의 화폐발행고 추이다. 전쟁 비용을 대느라 돈을 찍어댄 탓이다. 가진 게 없고 조세 수입도 미미한 판에 정부가 기댈 수 있었던 자금 조달 방법은 대외원조와 국채 발행, 신권 발행 등 세 가지였다. 미국의 원조가 예상을 밑돌고 국채는 제대로 소화되지 않는 상황에서 정부는 한국은행에 손을 벌렸다. 한은은 돈을 찍어내 정부에 넘겼다. 당연히 물가가 치솟았다. 편지봉투에 쌀이나 보리를 넣어 팔던 ‘봉투 쌀’ 가격은 달마다 두 배씩 뛰었다.


1953년 들어 악성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는 더욱 커졌다. 휴전 분위기를 타고 전쟁 복구, 경제 부흥을 위한 예산 수요는 폭증한 반면 돈 생길 곳은 없었으니까. 화폐발행고는 2월 중순 1조 1,367억원으로 불어났다. 재무부와 한국은행은 휴전이 성립돼 본격적인 전후 복구에 들어가려면 화폐개혁이 필수적이라고 여겼다. 어렵게 이승만 대통령을 설득한 재무부는 대통령의 긴급명령 13호, 긴급통화조치령을 내렸다. ‘1953년 2월17일을 기해 화폐단위를 100대1로 절하한다‘는 게 골자. 원(圓) 단위 기존 화폐의 통용을 금지하고 ‘환’ 단위의 새 돈을 도입했다.

요즘 말로 100대1의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에는 미국의 입김도 작용했다. 인플레이션을 잡지 못하는 한 원조의 효과가 나타나기 어렵다며 미국이 추가 원조에 난색을 표하자 정부와 한국은행은 통화개혁을 서둘렀다. 한국 돈의 평가 절하와 함께 그해 6월부터는 미 달러화의 가치를 일시에 3배나 올렸다. 미국의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건국 후 세 차례 단행된 화폐조치 중 두 번째여서 ‘2차 통화조치’로 불리는 통화개혁은 성공했을까. 평가가 엇갈린다. 이승만 정권은 성공적이라고 자평했다. 겉으로는 그리 볼 수도 있었다. 긴급명령 직전 1조1,367억원인 화폐발행 잔액 가운데 97.4%인 1조1,065억원이 회수됐으니까.


정부의 자화자찬과 달리 통화조치는 혼란을 불렀다. 정진석 외국어대 명예교수가 ‘한국 현대 언론사론’을 통해 묘사한 당시의 혼란. “마치 전쟁과 같은 소동을 불러일으키고 불과 몇 시간 안에 전국 각지의 모든 거래를 정지시키고 상점 문을 닫게 만들었다. 이 소동은 쓸 수 없게 된 원화를 새로운 환화로 바꿀 수 있는 17일부터 25일까지의 9일간에 이르러서는 은행과 금융조합 문 앞의 혼잡을 야기했다. 새로운 돈을 바꾸지 않으면 그날부터 끼니를 굶어야 하는 영세민들에게 정부 당국이 긴급 조치로 쌀을 방출했으나 좀체 곤란은 줄어들지를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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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전북대 교수(신문방송학)의 ‘한국 현대사 산책’에 따르면 물가도 오히려 뛰었다. 상인들은 손님들이 구권을 들고 몰려들자 상품을 창고 속에 감췄다. 어차피 바꿔야 할 화폐이기에 구화는 달갑지 않은 돈이었기 때문이다. 부동산 가격은 더 올랐다. 휴전에 대한 기대감으로 서울에 사람이 몰리는 와중에 집값이 들썩거렸다. 물가 오름세에 놀란 정부는 일정 기간 동안 예금인출 금지라는 조치까지 동원하며 시중의 돈을 흡수하려 했지만 은행에 머문 돈은 25%에 그쳤다. 물가가 잡힐 것으로 기대한 사람이 적었기 때문이다. 1952년 말 1,492원이던 입욕료는 통화개혁 직후 29환(2,900원)을 기록한 후 연말에는 60환으로 뛰었다.

전쟁 끝머리에 단행된 2차 통화조치는 그나마 3차 통화조치(1962년)에 비해서는 성과가 있었다는 평가다. 미국의 견제와 국민의 외면으로 혼란만 가중시켰던 3차 통화조치 강행 6개월 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스스로 ‘화폐개혁은 확실히 실패했다. 내자 동원을 위해 화폐 개혁을 하긴 했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1953년과 1962년, 두 번에 걸친 리디노미네이션으로 국민경제는 이익을 얻었을까. 장담하기 어렵다. 분명한 것은 달러화의 지위가 높아졌고 정부에서 달러화를 빌릴 수 있는 사람들이 돈을 벌었다는 사실이다. 기업인들이 창의력과 기술 개발, 시장 개척보다 금융과 환율정책에 의존하는 타성이 이때부터 생겼다.

어렵디 어렵다는 통화개혁은 지금도 논란거리다. 해마다 원화의 평가 절하, 리디노미네이션이 시급하다는 논쟁이 반복되고 있다. 제4차 통화조치가 필요하다는 당위성은 충분하다. OECD(경제개발협력기구) 가입국 가운데 대미 환율이 네 자리 수인 유일한 나라에서 지하자금 양성화와 원화의 위상 제고를 위해 필요하다는 것이다. 반론도 만만치 않다. 단위가 올라가면서 소수점으로 표시될 100원 단위의 반올림으로 물가 상승 우려가 크다. 지금도 5만원권이 금고 속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모든 화폐가 고액권화하는 리디노미네이션이 실행되면 화폐 퇴장이 늘어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불안 심리가 엉뚱한 방향으로 튈 경우 부동산 같은 자산 시장이 과열될 우려도 있다.

누가 집권하든 다음 정부에서는 ‘4차 통화조치’ 논의가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통화조치를 논하기 앞서 의문이 고개를 든다. 경제가 성장한다는 것은 자국 통화의 가치가 상승한다는 의미인데, 원화의 가치는 거꾸로 간다. 한국은 경제가 급속도 발전했다는 나라 중에서 원화의 가치가 떨어진 유일한 나라다. 통화조치가 필요하다면 경제성장의 과실이 정당하게 배분되는 구조도 논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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