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또 벨라! 페르페또!(아름다워! 완벽해!)”
국립오페라단의 신작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 연습이 한창 진행 중인 지난 6일 서울 서초동 국립예술단 연습동. 마리나 역을 맡은 메조 소프라노 양송미(43·사진)의 아리아를 들은 이탈리아 출신 스테파노 포다 연출의 입에서 칭찬이 끊이지 않았다. 양송미의 눈에도 자신감이 비쳤다. 러시아어 발음에 연기까지 꼬여 애를 먹었던 한 달 전 모습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성장이다.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만난 양 씨는 “스테파노 포다 연출과 본격적인 무대 연습을 시작하면서 연기를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느낌”이라며 “폴란드인으로서 국가의 이익에 봉사해야 한다는 책임감과 여자로서 느끼는 본능 사이에서 갈등하는 마리나의 모습으로 관객들과 만날 준비가 다 됐다”고 말했다.
러시아 오페라 무대는 처음 올라보는 탓에 역사 공부부터 작품 분석은 물론 발음 공부까지 3개월 이상 시간을 들였다. 2월부터는 림스키 코르샤코프 음악원 반주과 교수인 이리나 소볼레바 오페라·딕션 코치가 내한해 발음을 교정해줬다. “한 달 전만 해도 러시아어 발음 자체가 익숙치 않아 무대에서 시늉만 제대로 하고 내려와도 기적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집요하게 고민하고 연습했더니 최근 연습에서 포다 연출이 ‘이제 마리나 역할을 완벽하게 이해했구나’ 하더라고요.”
양송미는 한국을 대표하는 메조소프라노다. 한국 메조소프라노로는 최초로 세계 3대 오페라 하우스인 빈 국립극장에 데뷔했다. 특히 메조소프라노가 주역인 대부분의 오페라 국내 초연은 그가 주역을 도맡다시피 했다. 국내 관객들에게 노르마의 아달지자, 살로메의 헤로디아스, 루살카의 예지바바, 이도메네오의 이다만테 등의 캐릭터는 양송미의 역할로 인식될 정도다.
이번 작품이 양송미에 더욱 특별한 것은 베이스와 메조소프라노가 주역이라는 점이다. 특히 성악가들 사이에선 ‘메조소프라노의 설움’이라는 게 있다. 대부분의 유럽 오페라, 특히 이탈리아 오페라에선 특히 메조소프라노는 사랑의 훼방꾼이거나 사랑을 구걸하다가 늘 소프라노에게 사랑하는 이를 빼앗기는 애처로운 역할을 맡는 경우가 많다. 반면 ‘보리스 고두노프’의 마리나는 씩씩하고 자기 삶을 주도적으로 개척하는 현대 여성에 가깝다. “모처럼 다들 나를 사랑해주고 예쁘다고 해주는 역할을 맡으니까 그저 행복해요. 하지만 제가 맘에 드는 건 마리나가 요즘 디즈니 만화 캐릭터처럼 주도적인 여성상이라는 거예요. 극 속의 마리나는 14살이지만 명예와 부에 관심이 많은 여자고 후에는 폴란드에 러시아 정교를 없애고 가톨릭을 전파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가짜 드미트리를 통해 러시아의 왕비가 되기를 꿈꾸는 역할입니다.”
양 씨는 이번 작품에서 독특한 음악적 색채를 보여준다. 양 씨는 “러시아 특유의 마주르카 리듬에는 한의 정서가 담겨 있고 멜로디 라인도 따뜻해 쉽게 공감할 수 있다”며 “폴란드막에서 마리나가 사명감을 얻게 되면서 의상의 색이 순식간에 바뀌는 장면이 있는데 마리나 내면의 변화와 함께 2중창으로 부르는 아리아를 주목해서 들어보라”고 권했다.
올해부터는 경성대 예술종합학교 음악학부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두 아이 엄마로서, 오페라 가수로서 교수로서 1인3역을 하느라 눈코뜰새 없이 바쁘지만 보람도 크다. 양송미는 “아이를 낳고 내 몸이 아이를 낳고 키우기 위해 이 모든 걸 가지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요즘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내가 이 모든 일들을 배우고 겪었다는 생각이 든다”며 “내가 겪었던 실패와 깨달음을 학생들에게 전해주고 싶다”며 웃었다.
■보리스 고두노프는 어떤 작품
푸시킨 소설이 원작...러 민중의 역사 담은 대작
오는 20~23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무대에서 선보이는 ‘보리스 고두노프’는 러시아의 대문호 푸시킨의 동명 소설(1831년 발표)을 원작으로,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곡가 모데스트 무소륵스키가 만든 대작이다. 러시아 최초의 사실주의 비극이기도 하다.
이야기의 소재는 16세기 말 러시아 역사다. 모스크바 귀족 출신으로 16세기 러시아 차르였던 이반 4세가 죽고 그의 어린 아들 드미트리를 대신해 보리스 고두노프가 섭정을 맡았다. 그런데 드미트리가 갑작스럽게 죽으면서 보리스가 황태자를 암살했다는 소문에 기근까지 겹치면서 민중 반란이 본격화된다. 이를 틈타 가짜 드미트리가 나타나 모스크바로 진군하고 보리스는 망령에 시달리다 갑자기 죽음을 맞는데 이 모든 과정을 오페라 무대에서 풀어낸다.
1989년 러시아 볼쇼이 내한 공연 이후 28년만에 국내에서 공연되는 이번 작품에서 눈여겨 봐야 할 장면은 화려한 의상이 대거 출동하는 대관식 장면이다. 박제성 오페라 평론가는 “대관식 장면은 비극적인 민중들의 모습과 대비될 수 있도록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며 “이 오페라는 권력자의 심리극인 동시에 민중 중심의 역사극인만큼 대조를 이루는 인물과 장면, 장소, 각 아리아의 양극성을 주목해서 감상하면 좋다”고 조언했다.
음악 역시 유럽 중심의 오페라 음악 스타일을 탈피한 점이 특징이다. 1874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당시 황실극장)에서 초연됐을 때도 관객의 반응은 크게 엇갈렸다. 정식 음악교육을 받지 않았던 무소륵스키의 음악 어법이 관객들에게 익숙하지 않았던 탓이다. 김학민 국립오페라단 예술감독은 “러시아 민족 특유의 장대하면서 음울한 단조풍의 선율, 웅장하면서도 숙연한 오케스트레이션과 합창이 어우러진 러시아 오페라의 정수”라고 소개하며 “국내에 잘 알려진 차이콥스키가 다소 서양에 동화된 작곡가라면 무소륵스키는 음악은 물론 드라마와 정서까지 러시아 그 자체를 보여줄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