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시절 마을 어귀에 서 있던 오래된 나무는 현대인에게 고향의 상징이죠. 살 던 집은 사라진지 오래고, 옛 친구도 모두 도시로 뿔뿔이 흩어졌지만, 유일하게 남아있는 나무가 나를 반기는 것 같거든요. 나무는 그저 무심히 서 있지만, 인간은 거기서 위로를 받아요.”
나무 한 그루에도 저마다 사연이 있다고 믿고 19년 넘게 답사하고 글로 옮기는 고규홍(사진) 천리포수목원 이사는 나무 인문학자다. 그가 바쁜 직장인들에게 여유와 위로를 전하기 위해 한국도서관협회가 주관하는 ‘찾아가는 직장인 인문학’ 프로그램에 강연자로 나섰다. 오는 28일 일성건설 임직원들을 위해 강연을 준비하는 그를 최근 만났다.
그가 직장인에게 치유를 주제로 한 강연에 나서는 데는 나무에가 주는 위로의 힘을 전하기 위해서다. 고 이사는 “빌딩 숲에서 숨 가쁘게 살아가면서 도시의 공해를 빨아들이고 산소를 내 놓는 나무가 없다면 황폐함만이 남는다”면서 “도시인들이 나무와 더불어 느리게 살아가기 쉽지 않지만, 긴 세월 묵묵히 우리를 지켜준 나무를 보면서 위로받고 또 힘을 낸다는 사실을 가끔은 기억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성장과 개발에 몰입되었던 산업사회를 벗어나 이제는 우리 마음을 다스리고 서로 함께 살아가야 하는 마음을 키워야 할때”라면서 “살아있는 것으로부터 위로를 받는 인간이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자연과의 공존은 필수다.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으면서 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나무와의 공존을 먼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가 나무 인문학자가 된 데는 천리포수목원과의 깊은 인연에서 비롯됐다. 19년 전 기자생활을 접고 본격적인 작가의 길을 선택한 그는 우연히 천리포수목원에서 2개월 남짓 시간을 보냈다. 12월 한 겨울, 소복이 내린 눈밭 가운데 목련이 피어있는 광경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가 본 목련은 식물분류에서 비온디아이 속(屬)으로 추위에 강해 겨울에도 꽃이 핀다. 그는 ‘어떻게 한 겨울에 목련이 피었을까?’ 궁금증이 생겼다. 눈 위에 핀 목련은 그를 상상력의 한 가운데로 이끌었고, 내친김에 그는 천리포 수목원에 꽉 들어찬 나무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삶이 나무에 투영되어있다고 여긴 그는 나무를 인문학적으로 공부하기로 했다. 그가 선택한 연구방법은 식물학적인 차원이 아니라 나무를 심고 기르던 혹은 주변에 살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아내는 인문학적 스토리텔링이었다.
고 이사는 전국을 다니면서 나무를 관찰하고 얽힌 이야기를 찾아내기 시작했다. 우암 송시열이 괴산 암서재에 심은 향나무를 비롯해 남명 조식이 산청 산천재에 심은 매화나무 등을 직접 찾아다니면서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생각을 더듬어 나갔다. 그는 “조선의 유학자들은 나무를 곧은 절개의 상징으로 여기고 직접 나무를 심었다”면서 “소나무, 매화나무 등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말했다. 그는 유학자들의 나무를 찾는 데만 집중하지 않았다. 나무가 인간에게 포용이자 치유의 상징이라는 것은 사대부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민초들의 고통과 애환이 깃든 나무들도 발굴해냈다. 교수대가 되었던 참혹한 기억이 스며든 서산 해미읍성 회화나무, 흉년에 굶어죽은 아기의 무덤 위에 심은 진안 평지리 이팝나무 등 곳곳에 이야기를 찾아냈다. 그동안 그가 모은 나무 이야기가 3,000개를 넘었고, 책으로 엮은 것만 30여권에 이를 정도다. 2015년에는 시각장애인 피아니스트 김예지 씨와 나무답사 프로젝트를 기획하여 1년간 진행했다. 두 사람은 시각이 아닌 촉각으로 나무를 만날 때 사유와 상상력이 커진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는 소중한 기회가 됐다. 프로젝트는 EBS 다큐멘터리 ‘슈베르트와 나무’로 제작되고 동명의 책으로도 출간되어 감동을 전했다. ‘나무처럼 살고 싶다’ 마음먹고 지금도 주 1회 이상 나무답사를 하는 고 이사는 “내가 전하는 나무 이야기는 끝이 없다”면서 “내가 부지런해서가 아니라 나무가 전하는 이야기에 끝이 없기 때문”이라며 활짝 웃었다./장선화 백상경제연구원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