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대 기업인 삼성그룹이 오너와 컨트롤타워가 동시에 없는 초유의 상황에 처한 가운데 장기적 안목의 대규모 투자와 당장 시급한 사장단 인사를 조율할 수 있는 경영체계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과거 미래전략실처럼 강력한 권한을 가진 컨트롤타워까지는 아니더라도 계열사 간 사업을 조율하고 사장단 인사를 논의할 수 있는 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28일 재계에 따르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5년 실형에 따른 경영 공백이 장기화되는 상황에서 삼성이 주요 사업에 대한 신규 투자와 조직 운영의 핵심인 사장단 인사를 논의할 수 있는 조직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미 예정된 수준의 단계별 투자 집행과 제한적인 임원 인사만 진행되는 상황에서 현실로 닥친 이 부회장의 공백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삼성이 지금이라도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조언이다.
삼성그룹은 그간 총수와 그룹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는 미래전략실, 계열사 최고경영자(CEO) 삼각편대가 톱니바퀴처럼 굴러가며 경영 효율성을 높여왔다. 미전실과 계열사들이 구체적인 액션플랜을 짜면 오너가 방향을 결단하고 이를 바탕으로 전사(全社)가 속도감 있게 추진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국정농단 사태로 삼성의 두 축인 총수와 컨트롤타워가 동시에 사라졌다. 계열사 간 사업을 조정할 주체와 조율된 결과를 가지고 과감한 투자 등을 통해 사업을 끌고 나갈 강력한 추진력이 없어진 것이다. 삼성의 한 관계자는 “신규 사업 발굴을 위한 대형 인수합병(M&A)이나 투자는 현재로서는 올스톱”이라면서 “당장은 문제가 드러나지 않을 수 있겠지만 몇 년 후면 지금 사태의 결과나 서서히 나타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전문가들이 총수와 컨트롤타워 부재 속에서 삼성이 비상경영을 이끌 수 있는 경영체계가 필요하다고 지적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미전실 해체 이후 어쩔 수 없이 계열사들의 자율경영을 선언하긴 했지만 개별 회사 차원에서는 그룹 전체를 보는 안목에서 나올 수 있는 경영에는 한계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삼성과 같은 거대 기업이 계열사별로 독립경영을 한다는 것은 숲(그룹 전체)을 보지 않고 나무(계열사 사안)만 보고 경영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비유했다.
그룹 전반을 컨트롤할 수 있는 체계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배경에는 삼성 계열사들이 미래 먹거리 마련을 위해 분주하게 신사업 진출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중복이 발생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도 깔려 있다.
삼성을 비롯한 기업들은 통상 소수 인력만 투입해가며 철통 보안 속에서 신사업의 초기 단계를 검토한다. 논의가 진전되면서 인력 투입과 투자 규모가 늘어나는 형태다. 이런 특성을 고려할 때 삼성 계열사들끼리도 서로의 신사업 추진 현황을 모른 채 중복 추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재계 관계자는 “신사업 추진 사실이 알려졌을 때는 이미 어느 정도 자체적으로 사업을 진행한 후”라면서 “그룹 전체로 본다면 심각한 경영 효율 악화”라고 말했다.
권종호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기업 집단을 경영할 경우 집단 내 개별 기업에는 이익이 될 수 있지만 집단 전체적으로는 마이너스인 경우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면서 “기업 집단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컨트롤타워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1년 가까이 단행하지 못한 사장단 인사를 더 이상 지체하면 안 된다는 것도 이유다. 사장단 인사가 이뤄지지 않으면서 조직 전체의 긴장도가 떨어지고 있다는 게 삼성 안팎의 평가다. 계열사 칸막이 없이 적재적소에 인재를 활용하려는 삼성의 인사 운용 방침에도 한계가 생긴다. 삼성 고위 관계자는 “그룹 컨트롤타워와 이 부회장 부재로 사장단 인사를 어떻게 할지 논의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이 관계자는 “이 부회장이 풀려나야 어떻게든 자율경영체제 하에서의 사장단 인사 방식을 논의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반면 삼성은 이런 논의에 대해 조심스러운 분위기다. 그룹 쇄신 차원에서 미전실을 해체한 마당에 또다시 그룹 전반을 컨트롤하는 경영체계를 만드는 데 대해 극도로 민감해한다. 삼성은 미전실 뿐 아니라 매주 수요일 열던 사장단 회의도 폐지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지금과 같은 여론 분위기 속에서 자칫 오해의 소지가 있어 삼성 입장에서는 컨트롤타워 조직 부활이 매우 조심스러울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