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로터리] 인공지능 ‘왓슨’과 아버지의 왕진 가방

신준식 자생의료재단 명예이사장

신준식 자생의료재단 명예이사장


지난해 이세돌 9단이 구글의 인공지능(AI)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에 패배해 충격을 안겨줬다. 혹자는 “인공지능 시대의 서막을 알렸다”고 말했다. 세계경제포럼의 창립자 클라우스 슈바프는 인공지능·빅데이터 등으로 4차 산업혁명이 쓰나미처럼 밀려올 것이라 예언했다. 의료계도 변화의 중심에 있다. 수술이나 재활훈련을 돕는 로봇도 나왔고 암 치료방법 선택을 도와주는 인공지능 ‘왓슨’까지 등장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기계를 뛰어넘을 인간만의 장점은 어떤 것일까. 진심 어린 마음, 필자와 같은 한의사에게는 ‘인술(仁術)’이 아닐까 한다.


우리 집안은 7대째 한의사 가업을 이어왔다.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왕진을 나설 때 말 뒤에 타고 따라다니셨다. 나도 아버지의 왕진 자전거 뒷자리에 동승하는 일이 잦았다. 한의학과 서양의학을 병행한 아버지가 왕진 가방을 열면 내 눈은 휘둥그레지기 일쑤였다. 침·한약과 청진기·메스 등 진기한 의학 도구들로 가득 찬 가방은 어린 내 눈에는 사람을 살리는 ‘마술상자’였다.

한국전쟁 후 다친 사람은 많고 제대로 된 의사가 별로 없던 시절 “숟가락 들 힘만 있으면 환자를 돌보는 게 의사”라던 아버지는 환자가 있는 곳이라면 40리가 넘는 길도 마다하지 않으셨다. 왕진 자전거를 탄 아버지의 등은 언제나 따뜻함이 넘쳤다.


하루는 한 무리의 마을 사람들이 양잿물을 마신 여인을 살려달라고 아버지의 자전거를 막아섰다. 하필 다른 볼 일로 길을 나서 왕진 가방도 간단한 의료도구도 없었다. 아버지는 급한 대로 자전거 공기주입기의 호스를 잘라 위세척을 해 가까스로 여인을 살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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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길 내내 아무 말 없던 아버지는 다음날 새벽같이 일어나 왕진 가방에 한약을 넣어 여인을 다시 찾으셨다. 그리곤 “무슨 이유에서 생을 저버리려 했는지 모르지만 생명은 소중하니 자기 목숨이라고 함부로 다루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다. 꼭 잡은 두 손과 아버지의 떨리는 목소리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그날 아버지의 왕진 가방에 들어 있던 것은 ‘위를 치료하는 한약’이 아니라 ‘마음을 치료하는 온정’이었으리라.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한 왕진 길은 내게 생명을 살리는 일의 숭고함을 말없이 전해줬다. 아버지는 척추결핵으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병상에 누운 채로 찾아온 환자들에게 침을 놓으셨다. 곁을 지키던 내게 마지막까지 환자를 생각하는 ‘긍휼지심(矜恤之心)’을 가르치셨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우려와 기대가 공존하는 시대가 됐다. 아무리 인공지능이 발달한다 해도 아버지처럼 의사가 환자를 생각하는 마음을 어찌 따라올 수 있을까. 지금도 거울 앞에 서면 마음의 병부터 치료하는 ‘심의(心醫)’인지 자문하고는 한다. 의학의 진보를 접할 때면 반가움과 동시에 묵묵하고 포근했던 아버지의 등이 아련하다.

신준식 자생의료재단 명예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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