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준 자유한국당 혁신비상대책위원장이 취임하자마자 김영란법(청탁금지법) 위반 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근본적으로 모호한 법 자체를 이번 기회에 명확히 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법 적용 대상과 위법행위 범위가 워낙 넓고 유권해석을 내리는 국민권익위원회조차 ‘명확한 판단이 어렵다’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상황이 이러니 청렴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법의 근본 취지와는 다르게 부작용만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현령비현령(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이라는 자조 섞인 목소리도 나온다.
우선 권익위는 김 위원장의 프로암 경기 참가가 청탁금지법 위반되는지를 묻는 서울경제신문의 질의에 “지난 3월 경찰청에 사실관계를 의뢰한 상황”이라고 밝혔다. 주무부처도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 관련 규정도 주먹구구식이다. 김 위원장 논란의 핵심은 학교로부터 급여를 받지 않는 명예교수도 청탁금지법 적용 대상이냐는 것인데 고등교육법에 따르면 명예교수는 대상이 아니다. 명예교수나, 정교수나 비슷한 영향력을 발휘하지만 합당한 근거 없이 적용 대상을 갈라놓았다. 김 위원장이 제공 받은 것의 가치가 100만원을 넘느냐도 관건이지만 관련 법령에는 가치를 매길 때 소비자가격으로 하는 것인지, 협찬제품은 어떻게 가격을 매길지 등을 명시하지 않고 있다.
현장은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올가을 프로암대회를 개최할 예정인 한 금융그룹 관계자는 “지난해 대회부터 공직자 등 청탁금지법에 적용을 받는 인사를 일절 초대하지 않고 있지만 스포츠 이벤트에 초청하면서 배우자의 신분까지 조심스럽게 확인해야 한다는 상황이 불편하다”고 전했다. 골프대회 운영대행 업체의 한 관계자도 “참가 기념품의 가치를 얼마로 책정해야 하는지 모호하다”며 “홍보 효과를 바라고 업체에서 협찬하는 제품도 있는데 이런 것을 비용에 포함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명확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기업들도 불안을 호소하고 있다. 한 대기업 임원은 “규정이 너무 포괄적이어서 홍보, 사회공헌 행사를 할 때 누구까지 초청하고 어느 수준까지 대접을 하며 사은 이벤트를 할지 고민이 많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법무법인 등에 자문을 구해봐도 딱 떨어지는 답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권익위에 물어봐도 구체적인 사례별로 명쾌하게 유권해석을 얻기 어렵고 그나마 조언을 주더라도 실제 위반 여부 판단은 법원에서 하게 된다는 식의 단서가 붙어 불안하다”고 하소연했다. 정치권에서도 보완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야권의 한 의원은 “권익위에 문의해도 ‘명확히 판단하기 어려운데 주의하라’ 식의 답변이 올 때가 많다고 한다”며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의 법 집행이 되고 있으며 본인도 모르는 사이 법을 위반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꼬집었다.
일선 학교에서도 혼란이 일고 있다. 지방의 한 초등학교 교사는 “졸업해 중학생이 된 옛 제자가 선물을 준비해왔는데 그의 동생이 내가 가르치는 학교에 다니고 있어 문제가 될 것 같아 받지 않았다”며 “정성껏 준비한 선물을 다시 들고가라고 해 여간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말했다. 권익위의 한 관계자는 “동생이 다니는 학교의 교사에게 졸업생이 건넨 선물과 관련해서는 해석 사례가 없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며 “우리도 찾아보고 검토해봐야지만 알 수가 있다”고 말했다.
이에 애꿎은 관련 시장만 위축될 조짐이다. 클래식·오페라 등 공연 분야가 대표적이다. 한 대형 공연 기획사 관계자는 “해외 유명 오케스트라나 거장 지휘자의 내한 공연을 유치하려면 기업의 후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며 “청탁금지법 시행 이후 기업들의 후원 규모가 위축되면서 공연 유치에 다소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게 사실”이라고 토로했다.
/이태규·박민영·임지훈기자 classic@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