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정치·사회

메르켈의 퇴장, EU 정치지형에 몰고 올 가장 큰 변화는?

이번 주 유럽 정가가 크게 동요치는 사건이 터져 나왔다. ‘자유세계의 총리’로 불리며 유럽연합(EU)을 이끌어온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12월 당 대표 선거에 불출마를 밝히고 사실상의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지난 13년간 유럽연합(EU)의 실질적 리더로 미국과의 견제·균형을 추구해온 만큼의 그의 퇴장이 국제관계에 미칠 파장과 유럽 내에 정치지형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그를 대체할 리더십이 뚜렷하지 않은 상태에서 후계자 자리를 둘러싼 경쟁도 치열할 전망이다.

메르켈 총리의 일선 후퇴는 민주주의적 가치와 다자주의적 협력을 중시하는 중도노선의 퇴조와 증오·배타주의를 앞세운 극우 포퓰리즘의 부상이라는 글로벌 정치 흐름의 거대한 변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된 2016년 11월 이후 열린 ‘우파 포퓰리즘’ 혹은 ‘트럼피즘(Trumpism)’의 전성시대는 메르켈이 대표하는 중도적 포용의 리더십, 일명 ‘메르켈리즘’의 퇴장을 부르며 위력을 과시하는 동시에 관용·다양성·인권 등의 가치가 퇴조한 지구촌에 반난민·민족주의·혐오 구호가 난무하면서 세계 정치지형이 중대한 변곡점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전통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포퓰리즘은 지난 10년 동안 눈에 띄게 세력을 불려왔다. 톰 올릭 블룸버그 인텔리전스 수석 아시아 이코노미스트가 최근 주요20개국(G20)의 경제규모를 기준으로 분석한 결과 전통적인 주류 민주주의 세력이 집권한 국가의 경제 비중은 2007년 83%에서 2018년 현재 32%까지 떨어진 반면 포퓰리즘 세력이 장악한 국가의 비중은 4%에서 41%로 10배 이상 커졌다. 이 같은 극적인 변화의 중심에는 2016년 등장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있다는 데 큰 이견이 없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이 지난 6월8~9일 캐나다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 책상에 손을 짚은 채 자신을 몰아붙이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왼쪽 두 번째) 등과 대화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이 지난 6월8~9일 캐나다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 책상에 손을 짚은 채 자신을 몰아붙이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왼쪽 두 번째) 등과 대화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메르켈의 지도력 쇠퇴는 최근 서구의 격변과 불안정을 상징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크게 세 가지 의미가 내포돼 있다.

우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서구의 지도력 공백과 불투명성의 가속화에 불을 지핀다는 점이다. 2000년부터 기민련 대표로, 2005년부터는 총리로 재직해온 메르켈은 독일의 최장수 총리를 노릴 뿐 아니라 유럽에서 가장 큰 지도력을 행사해온 정치인이다. 그 배경에는 유럽연합(EU)의 최대 국가인 독일의 위상도 있지만, 그가 보여준 신중하고 실용적이고 포용적인 지도력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이후 미국과 유럽의 대서양동맹을 훼손하고, 이민 등 국내 문제에서 극우적인 노선을 걷자 메르켈은 서구의 지도력 공백을 메우는 마지막 보루로 인식돼 그를 구심점으로 맞대응 해왔다. 하지만 그는 결국 난민 문제로 촉발된 극우 바람 속에서 퇴장을 앞둔 신세가 된 것이다.


둘째는 유럽 통합의 미래가 더욱 불투명해졌다. 난민 문제는 유럽연합 내에서 영국의 탈퇴와 다른 회원국들의 동요를 촉발했다. 유럽연합과 영국은 탈퇴 방식을 놓고 아직 씨름 중인데, 유럽연합의 실질적 지도자 메르켈의 약화는 양쪽 모두에게도 협상력을 약화시키는 빌미가 될 수 있다. 유럽연합은 독일과 프랑스 연대에 기반한다. 이 연대에서도 더 큰 지분을 가진 독일에서 유럽 통합을 찬성하는 기존 정당들의 약화는 통합의 동력을 약화시킬 뿐 아니라 유럽연합을 위기로까지 밀어넣을 수도 있다. 특히 안정된 지도력으로 포용력 있게 회원국들을 감싸던 메르켈을 대신할 인물을 당분간 찾기 힘들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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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2차대전의 반성 속에서 우러난 유럽의 관용과 다원주의가 최대 위기를 맞게 됐다. 메르켈은 중도보수 정치인이기는 하나, 유럽의 어떤 진보정당 지도자보다도 관용과 다원주의를 옹호해왔다. 이는 유럽을 2차대전 전의 분열로 몰아넣을 수 없다는 전후 유럽 지도자들의 ‘합의’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러나 난민 문제로 촉발된 극우 바람에 좌초된 메르켈의 지도력은 유럽의 관용과 다원주의를 2차대전 이후 최대 위기에 빠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29일 이번이 자신의 마지막 총리 임기라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 출처=기민련 누리집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29일 이번이 자신의 마지막 총리 임기라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 출처=기민련 누리집


이제 세간의 관심은 ‘포스트 메르켈 시대’로 향하고 있다. 국제관계에서도 변화가 예고된다. 워싱턴포스트(WP)는 “메르켈 총리는 자유주의적 국제질서를 추구하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민족주의 스타일에 대한 균형추 구실을 해왔다”며 “느린 속도의 퇴장은 공허함을 남긴다”고 했다. EU 내 혼란도 예상된다. 현 상황에서는 역내 정치를 아우를 지도자가 마땅치 않다고 WP는 전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는 각각 개혁 반발, 브렉시트(Brexit) 협상 등으로 정치적 위기를 맞고 있다. 마테오 살비니 이탈리아 부총리 겸 내무장관, 빅토리 오르반 총리는 난민문제를 두고 EU와 번번이 충돌했다. 가디언은 “사실상 EU 지도자였던 그의 이탈은 대륙의 정치적 안정과 합의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큰 위험에 처해있음을 의미한다”고 분석했다.

사실 포퓰리즘의 대세화는 유럽 정치에 가장 큰 지각변동을 초래했다. 9월 실시된 스웨덴 총선에서는 반난민을 내세운 극우 성향 정당인 스웨덴민주당이 돌풍을 일으키며 제3당으로서 캐스팅보트를 통해 스웨덴 정국을 좌지우지할 정도의 강력한 영향력을 갖게 됐다. 올 4월 헝가리 총선에서는 빅토르 오르반 총리가 반난민·반EU를 무기로 내세워 4선에 성공했고 6월 슬로베니아 총선에서도 반난민 캠페인을 벌여온 우파 정당 슬로베니아 민주당이 제1당에 올랐다. 서방 자유주의 진영의 보루였던 독일 메르켈 총리가 무너진 것은 이 같은 흐름에 쐐기를 박을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메르켈 시대가 저무는 것은 서방이 불확실성의 시대로 접어드는 전조이자 트럼피즘의 유럽 제패의 시작을 알리는 전주곡”이라고 분석했다.

한편 남미에서는 19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핑크타이드(온건 사회주의 성향의 물결)’가 퇴조하며 우파의 세력에 휩쓸리고 있다. 2015년 마우리시오 마크리 아르헨티나 대통령의 당선을 기점으로 서서히 좌파에 등을 돌리기 시작한 남미대륙은 2016년 페루 대선과 올해 파라과이·콜롬비아 대선에서 우파의 득세를 확인했다. 과도한 복지로 초래한 경제파탄과 부패에 시달려온 이들 국가는 친시장주의적 우파로 무게추를 옮겨갔다. 여기에 최근 치러진 브라질 대선은 남미가 단지 친시장적 우파로 치중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극단적인 보수 포퓰리즘으로 치달았다는 점에서 남미 정치의 변곡점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렇다면 중도파가 물러나고 포퓰리즘이 득세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금융위기 이후 장기화한 경제난 속에서 고조된 기성 정치인들에 대한 실망감에 더해 이념보다 실리를 추구하는 정서가 깔렸다는 분석을 내놓는다. 달리 해석하면 갈수록 커지는 경제적 양극화와 난민 문제 등을 해결하지 못하는 주류 정치세력 대신 변방에서 과격한 목소리로 대중이 품어온 불만을 자극한 ‘아웃사이더’ 정치인들이 대안 세력으로 선택받은 것이다. 올릭 이코노미스트는 “이들 세력은 2008년 금융위기로 흔들린 경제와 높은 실업률, 소득불평등을 해결하지 못한 서구 민주주의 정권들의 실패를 부각시키면서 부상했다”고 지적했다.

지난 7월과 8월 1097개 품목 500억 달러 규모의 중국산 제품에 25%의 관세를 부과했다. 또 9 월에는 난달에도 2000억 달러 규모의 수입품에 10% 관세를 매겼다. 내년에는 그 세율이 25%로 올라간다. /연합뉴스지난 7월과 8월 1097개 품목 500억 달러 규모의 중국산 제품에 25%의 관세를 부과했다. 또 9 월에는 난달에도 2000억 달러 규모의 수입품에 10% 관세를 매겼다. 내년에는 그 세율이 25%로 올라간다. /연합뉴스


문제는 이 같은 포퓰리즘이 세계 곳곳에서 갈등과 분열의 정치를 확산시키며 심각한 부작용을 낳고 있다는 점이다. 워싱턴포스트(WP)는 “포퓰리즘 정당은 지난 수년간 부패한 기득권에 맞서 서민층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걸고 세계화보다 자국 우선주의를, 복잡한 정치 논쟁보다 단순한 해법을 앞세워 표심을 얻는 데 급급해왔다”며 “우파 포퓰리즘의 확산은 세계 각국이 눈앞의 이익만 추구하며 서로의 대립과 갈등을 조장해 결국 자기 나라는 물론 전 세계를 파탄으로 몰고 갈 수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 같은 이들 포퓰리즘 정치인은 대개 강한 리더십과 신권위주의를 앞세운 ‘스트롱맨’을 표방하며 세계 정치문화에서 ‘관용’과 ‘다양성’의 설 자리를 위협하고 있다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크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 같은 흐름은 세계대전 전후 질서에 도전하고 인류보편적 가치에 기반한 다자주의를 흔들고 있다는 점에서 공동협력을 중시하는 국제사회에 커다란 위해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이현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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