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시장에도 경기 성장세 둔화로 인한 불황의 그늘이 드리우고 있다. 지난 연말부터 경매 프리뷰 전시장의 방문객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드는 경향이 감지된 데 이어 지난 13일 열린 서울옥션의 올해 첫 메이저 경매는 69%라는 저조한 낙찰률로 장을 마감했다. 특히 시작가 60억원에 기대를 모았던 김환기의 ‘항아리’와 희소성 높은 고려불화로 추정돼 시작가 30억원에 경매에 오른 ‘아미타불도’ 등 고가 출품작이 나란히 유찰됐다. 하지만 미술시장이 조정기에 들어서면 투자자 입장에서는 오히려 경합을 피해 ‘저가 매수’의 기회를 노릴 수 있다. 대형 미술관 전시 등 작품 평가의 ‘호재’가 있다면 더욱 주목해야 한다.
케이옥션은 오는 20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사옥에서 여는 3월 경매에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김환기의 작품을 11점이나 선보인다. 85억원의 최고가 낙찰 기록가를 보유한 김환기는 한국미술계의 ‘블루 칩’인데다 최근 중국 상하이 파워롱미술관에서 ‘김환기와 단색화’를 주제로 한국 추상미술 전시가 성공리에 개최됐고 국립현대미술관이 대규모 회고전을 기획 중이다. 케이옥션은 1950~70년대 구상과 추상, 종이와 캔버스 작품을 다양하게 구비했다. 스케치북만 한 종이에 수채물감의 일종인 과슈로 그린 1963년작 ‘무제’는 김환기가 즐겨 사용한 푸른색조에 반복된 선과 점으로 이뤄진 작품인데 추정가 2,000만~4,000만원에 나왔다. 유려한 선으로 산을 표현한 1961년작 ‘산’(이하 추정가 2,000만~3,500만원), 검은 선과 청색·홍색의 점으로 매화가 피어오른 듯한 분위기를 연출한 1963년작 ‘무제’(3,600만~5,000만원)도 눈길을 끈다. 지난해 11월 경매에 나왔던 김환기의 비슷한 크기 과슈 작품 ‘무제’(1963년작)가 5,000만원에 낙찰된 사례 등과 비교해 보면 추정가를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도전할 만하다. ‘한국 인상파 미술의 개척자’ 오지호의 ‘아마릴리스’는 1,200만~3,500만원에 나왔다. 풍경을 즐겨 그린 오지호의 희귀한 정물화로, 1985년 국립현대미술관 회고전에 출품됐던 중요한 작품이기도 하다.
최고가 출품작이기도 한 이우환의 1987년작 ‘바람과 함께’는 150호 크기인 181.8×227.3㎝의 대작으로 추정가 12억~16억원에 경매에 오른다. 이우환의 국내경매 최고가 기록은 지난 2012년 서울옥션 홍콩경매에서 팔린 1977년작 ‘점으로부터’이며 당시 낙찰가는 약 21억3,000만원이었다. 2014년 11월 소더비 뉴욕 경매에서는 1976년작 ‘선으로부터’가 약 23억7,000만원에 낙찰돼 작가 최고가 작품이 됐다.이우환의 1970년대를 대표하는 작품이 절제된 구성의 ‘점으로부터’와 ‘선으로부터’라면 1980년대는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자유로움을 표현한 ‘바람’ 연작이 대표작이다. 사각형에 가까운 한두 개의 점으로 이뤄진 ‘조응’ 시리즈는 그 이후에 탄생했다. ‘바람’과 ‘조응’ 및 ‘대화’ 연작은 1970년대 작품들보다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으나 꾸준히 상승 추세다. 지난 2017년 3월 홍콩경매에서는 ‘바람’이 추정가 2배를 웃도는 약 16억6,000만원(1,150만 홍콩달러)에 낙찰돼 해당 시리즈 중 최고가를 기록했다. 한국인 생존 미술가로 국제 미술계에서 가장 유명한 이우환은 지난달 프랑스 퐁피두 메츠 센터(Centre Pompidou-Metz)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개막해 오는 9월 19일까지 열린다. 이미 카셀 도큐멘타, 구겐하임미술관, 베르사유궁 등 세계 주요 전시를 섭렵한 이우환의 미술사적 위상이 이번 전시를 계기로 한층 높아질 전망이라 시장 측면에서는 ‘호재’다.
케이옥션은 이외에도 이우환의 30호 크기 ‘바람과 함께’(1억8,000만~4억원), 100호짜리 ‘조응’(2억2,000만~3억5,000만원)을 출품한다. 서울옥션은 ‘홍콩 아트바젤’ 기간인 오는 29일 홍콩 내 자사 전시장에서 개최하는 ‘제28회 홍콩세일’에 이우환의 작품을 5점 내놓는다. 161.8×130㎝의 1986년작 ‘바람으로부터’(9~12억원)가 눈길을 끈다. 바람 시리즈 중 후기작품에 해당하는 1991년작 ‘바람과 함께’(1억~1억8,000만원), 여백과 점 사이의 상호 긴장과 여유 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2013년작 ‘대화’(3억7,000만~6억원)도 만날 수 있다.
오는 10월 영국 테이트미술관 회고전을 시작으로 세계 순회전 및 곳곳의 전시가 예정된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도 경매에서 만날 수 있다. 서울옥션은 백남준의 ‘로봇 서커스-페인트’(2억3,000만~4억원)와 실크스크린에 TV프레임을 콜라주한 작품 ‘비디오 소나타 Op.56’(2,000만~3,000만원)을 선보인다.
미술시장연구소 소장인 서진수 강남대 교수는 “시장은 복합적 요인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경기변동과 무관하지 않다”면서 “유찰이 잦은 것은 수요가 줄면서 가격조정에 들어갔다는 뜻인 만큼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조언한다. 그러면서도 서 교수는 “시장 전반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작가별 이슈가 있다면, 특히 미술사적 가치 재평가와 직결되는 미술관 전시 등은 눈여겨봐야 한다”며 “투자자 입장에서는 경기 하락이 저가 매수의 기회지만 동시에 좋은 값을 받기 어려운 까닭에 수작이 나오기 어렵다는 한계도 있으니 잘 살펴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