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과학 발전을 위해서는 ‘과학은 인내가 필요하고 (혁신적) 돌파구(Breakthroughs)는 하룻밤 사이에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과학계가) 영향력이 큰 저널에 실리는 논문 숫자와 특허에 너무 많이 중점을 두고 있어요.”
한국 과학기술계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한스 볼프강 슈피스(사진) 독일 막스플랑크폴리머연구소 명예소장은 23일 본지와의 e메일 인터뷰에서 “사실 저는 기초과학에서 잘 훈련받은 사람들, 특히 박사 과정 학생들이 산업계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이 최상이라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는 화학중합체 분야에서 인용이 많이 이뤄지는 논문을 대거 펴냈을 뿐만 아니라 단백질과 핵산의 구조해석에서 표준이 된 펄스전자상자기공명(EPR) 분광기를 개발해 기술이전하기도 했다.
우선 그는 지난 1991년 폴리머 과학자들과 함께 방한했을 때 경험한 한국 과학의 발전과 헌신 속도가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털어놓았다. 그 예로 당시 미국에서 활동하던 과학자들을 고국으로 불러들이기 위한 노력과 포항(포스코와 포스텍)과 같은 산학 협력을 거론했다. 그는 “이후에도 정기적으로 안식년을 한국 박사과정 학생과 산업체 소속 과학자와 함께 보내곤 했다”고 말했다. 한국이 막스플랑크를 벤치마킹해 2011년 기초과학연구소(IBS)를 창립한 것에 대해서도 올바른 방향으로 중요한 단계를 밟은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오늘날 높은 수준의 국제 협력이 중요하며 선두 그룹에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장기적으로 공공 기금을 지원받는 기초과학 연구소가 필요하다”고 했다.
1984년 막스플랑크폴리머연구소의 초대 소장을 지낸 그는 한국의 논문·특허 위주 연구에 대해 “세계적 현상”이라고 전제한 뒤 “많은 과학자들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고 이에 상응하는 진술이 국제 평가단 보고서에 포함되기도 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논문 숫자와 특허보다) 다음 세대 과학자들을 성공적으로 훈련시키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힘줘 말했다. 다시 말해 대학 이공계부터 시작해 석·박사 과정 학생, 포닥(박사후연구원)을 잘 키워야 연구개발(R&D) 생태계가 건강하고 풍성해질 것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한국의 과학발전을 위한 개선 방안을 묻자 그는 “프로그램을 너무 자주 변경하지 말라”며 “과학은 인내가 필요하다”고 명쾌하게 답했다. 그는 이어 “돌파구는 일반적으로 하룻밤 사이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장기 연구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그 사례로 최근 천체물리학계의 성과인 중력파 탐지와 최초의 블랙홀 이미지 생성을 들었다. 두 연구 모두 막스플랑크연구소가 국제 협력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자랑도 빼놓지 않았다.
돌파구는 하룻밤새 이뤄지지 않아
논문 위주 연구 인정 못받는 추세
프로그램 잦은 변경보다 긴호흡을
막스 플랑크, 공공지원에 자율성
獨선 기초·산업 등 연구 균형 초점
그는 막스플라크협회 소속 연구자들이 대거 노벨상을 수상한 것과 관련, “노벨상을 받는 데 매우 중요한 측면은 아무도 예상하지 않았던 혁신적 돌파구를 달성하는 것”이라며 “막스플랑크협회는 지식의 최전선에서 혁신적이고 학제 간 고위험 연구를 발전시킨다”고 비결을 소개했다. 학과 간 칸막이를 뛰어넘어 융복합 연구를 통해 도전적이고 창의적인 연구에 뛰어든다는 얘기다.
막스플랑크협회 소속 연구소들은 연방정부와 16개 주정부로부터 80% 이상 연구비를 지원받되 자율성이 보장된다. 기본철학이 독창적 연구를 통해 돌파구를 열 만한 뛰어난 연구자를 철저히 검증해 뽑으면 믿고 일일이 간섭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저도 비교적 이른 나이에 선발돼 엄청난 혜택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그는 “막스플랑크협회는 대부분 공공 자금으로 지원된다. 이것은 독립적이고 혁신적인 연구를 가능하게 만든다”며 “연구소들은 일부 산업계를 포함해 독일연구협회(DFG)나 유럽연구회(ERC) 등의 기관에서 지원받는 프로젝트를 매우 성공적으로 하고 있다”고 전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적절한 균형을 찾는 게 핵심이라고 했다. 예를 들어 DFG의 경우 막스플랑크연구소장들은 조정이 이뤄진 프로그램에만 신청할 수 있는데 이는 관련된 영역에서 국내외 협력을 장려하고 대학의 과학적 잠재력에 집중해 협력과 구조적 혁신을 촉진한다는 것. 그는 “이것은 막스플랑크연구소와 대학 간 연구협력을 키우게 된다”며 “독일 대학에서 자금 지원을 받는 우수 클러스터 중 절반가량은 막스플랑크연구소와 협력하고 있다”고 자부심을 표했다.
독일 주요 연구소의 역할 분담에 관해서도 자세히 소개했다. 흔히 막스플랑크는 기초연구, 프라운호퍼연구소는 산업화 연구에 치중한다고 알려져 있는 것과 관련, 그는 “동의하지 않는다. 독일은 다양한 연구에 부응하기 위해 대학 이외 공공기금을 지원받는 균형 잡힌 연구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다시 말해 기초과학에 중점을 둔 막스플랑크연구소, 지식 중심과 응용이 이뤄지는 기초 연구를 하고 과학 인프라 유지와 연구기반 서비스를 제공하는 라이프니츠연구소, 응용 중심 연구조직인 프라운호퍼연구소, 사회의 주요 과제를 해결하는 대규모 장비를 제공하는 헬름홀츠연구소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연구가 단순히 기초와 응용으로 나눠질 수 없어 각각의 연구소의 임무는 분명히 중복된다”며 “네 연구소 모두 대학과 성공적으로 협력해 윈윈 상황을 만들어낸다. 그 시스템은 사회를 위한 성공적인 R&D의 복잡한 속성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막스플랑크의 조직운영과 연구윤리 확립방안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막스플랑크협회는 최근 박사과정 학생, 스태프 과학자, 기술자들로부터 연구소의 근무 환경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한 몇 가지 방법을 도입했다”며 “조직 내 고위층은 물론 각 연구소에 옴부즈맨을 운영하고 있다. 연구소장은 종신직이지만 연구소장은 7년마다 임기를 갱신받아야 한다”고 털어놓았다. 연구원에 철저한 연구 자율성을 부여하는 것과 별개로 연구소장의 자질에 관해 국제 전문가 그룹과 기금지원 기관이 엄격하게 관리를 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고광본 선임기자 kbgo@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