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정치·사회

[새시대 여는 일본] '우경화' 아베정권과 동거…시험대 오르는 戰後세대 첫 일왕

<상> 저무는 헤이세이, 막 오른 레이와

부친 아키히토 일왕처럼 온건한 평화주의자로 알려져

정치적 파워 약해 개헌·외교문제서 목소리 낼지 미지수

日국민 58% "레이와 시대 좋은 방향으로 갈 것"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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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125대 아키히토 일왕의 퇴위식을 끝으로 지난 31년간 이어져온 일본 ‘헤이세이(平成)’ 시대가 막을 내린다. 오는 5월부터는 그의 아들 나루히토 왕세자를 새 일왕으로 맞는 ‘레이와(令和)’ 시대의 막이 열린다. ‘잃어버린 20년’으로 표현되는 장기불황과 정치적 혼란으로 기억되는 헤이세이 시대를 떠나보내며 다시 새로운 출발선에 선 일본이 레이와 시대에 어떤 행보를 보일지 일본 국민들은 물론 국제사회가 주목하고 있다.

2세기 만에 처음 이뤄지는 양위로 일본 전역은 축제 분위기다. 지난 1989년 쇼와(昭和) 시대의 히로히토 전 일왕 사망으로 침울한 분위기 속에 헤이세이를 맞이했을 때와는 판이하다. 특히 지난주 말부터 열흘간의 황금연휴를 맞아 일본인들은 한껏 들뜬 모습이다. 요미우리신문이 26~28일 18세 이상 1,053명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레이와 시대에 일본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보는지 묻는 질문에 58%가 ‘좋은 방향으로 갈 것’이라는 기대감을 내보였다. ‘나쁜 방향’으로 갈 것이라고 응답한 비율은 17%에 그쳤다.

이처럼 레이와 시대에 대한 기대감이 높은 것은 아키히토 일왕이 강조했던 평화주의와 서민 친화적 분위기가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아사히신문이 최근 공개한 여론조사 결과에서 ‘왕실에 친밀감을 갖고 있다’는 응답은 76%에 달했다. 아키히토 일왕은 재임 기간에 전쟁을 참회하며 우경화하는 일본 정치권과 대조되는 모습을 보였고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에는 피해지역을 찾아 무릎을 꿇고 낮은 자세로 이재민과 대화하는 등 서민적이고 스스로를 낮추는 자세를 보여 국제사회의 호평과 일본 국민들의 존경을 받아왔다. 그의 뒤를 잇는 장남 나루히토 왕세자 역시 아버지와 같은 온건한 평화주의자로 알려진 만큼 레이와 시대에도 일본 왕실의 평화주의 표방이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아버지의 행보를 이어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다만 그는 직접 전쟁을 겪지 않은 첫 ‘전후세대’ 일왕인 만큼 주변국과 일본의 갈등 요인인 역사인식 문제에서 어떤 행보를 보일지 관심이 모인다.


다만 레이와 시대가 일본 국민들의 기대만큼 순탄하게 흘러갈지는 장담할 수 없다. 국내적으로는 고질적인 디플레이션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데다 대외적으로도 보호무역 성행과 동북아시아 패권경쟁 강화라는 녹록지 않은 여건에 처했다. 게다가 보수·우경화한 아베 신조 정권이 레이와 시대에 개헌을 본격적으로 추구할 방침이어서 헤이세이 내내 이어진 ‘전쟁 없는’ 평화가 흔들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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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아키히토 일왕 즉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부동산 거품이 붕괴됐던 헤이세이 초기와 비교하면 레이와 시대가 맞은 경제 여건은 그리 나쁘지 않다. 다만 중앙은행의 장기 마이너스금리 정책에도 주요 기업의 임금상승률이 여전히 2%대로 거품경기 막바지인 1990년의 5.94%를 크게 밑돌고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1.2%에 그치는 등 일본 경기는 아직 헤이세이의 고질적 경제 문제를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헤이세이 시대 초기 세계 최고 수준이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현재 룩셈브루크와 노르웨이의 절반으로 떨어지며 세계 25위 수준에 머물고 있으며 헤이세이 초 시가총액 기준 세계 상위 10개 기업에 일본 기업 7개가 포진했지만 현재는 1~2개 수준에 그치고 있다. 마이너스금리 후폭풍으로 은행권의 부동산대출 잔액은 지난해 말 기준 78조9,370억엔으로 2015년 이후 4년 연속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며 또 다른 버블 붕괴 사태가 불어닥칠 수 있다는 경고음까지 들린다.

국제무역시장에서도 난관이 예상된다. 특히 미국에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선 후 보호무역이 성행하며 자유무역을 주도해온 일본을 위협하고 있다. 다음달 일본을 국빈방문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일왕의 즉위를 기념하는 자리에서 농산물 시장 개방, 대미무역 적자 축소를 노골적으로 압박할 수 있다는 관측이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재팬타임스는 “자유로운 국제질서가 무너지고 세계화 및 자유무역 개념이 위협받고 있다”면서 “레이와 시대에 일본 경제는 전례 없는 속도의 변화와 구조개혁을 반드시 이뤄야 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동북아 외교 문제는 좀처럼 풀기 힘든 난제다. 헤이세이 초 명실상부한 아시아 최고 경제·군사 강국이던 일본은 이미 중국에 그 자리를 내준 지 오래다. 중국과 일본은 분쟁지역인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열도)를 둘러싸고 수년째 충돌하고 있고 대법원의 위안부 배상 판결 이후 한국과의 외교적 관계는 더욱 경색됐다. 나루히토 왕세자가 평소 국제 평화와 환경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여왔지만 헌법상 정치적 영향력이 없는 그가 외교 부문에서 역량을 발휘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만큼 일본을 ‘전쟁할 수 있는 국가’로 되돌려 군사 강국 일본을 부활시키겠다는 아베 총리의 야욕이 레이와 시대에 한층 노골화할 우려가 있다. 나루히토 왕세자가 전쟁에 반대하더라도 부친보다 더 조용한 이미지인 그가 개헌과 관련해 얼마나 목소리를 낼지는 미지수다.


김창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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