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중공업(097230) 통상임금 소송에서 근로자 측 손을 들어준 대법원이 판결문에 엉터리 수치로 논거를 댄 것으로 확인됐다. 완전자본잠식 회사에도 “경영상 어려움을 따지는 신의성실의 원칙(신의칙) 적용은 어렵다”고 미리 결론을 내리고 상고심만 3년 동안 끌면서 성의 없이 판단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다. 더욱이 신의칙과 관련해서는 대법원의 첫 상장사에 대한 판결이라 이전에 나왔던 비상장사들에 대한 판결 근거도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사법 불신이 최근 극대화된 상황에서 정치·사회적으로 민감한 주제는 치열한 법리 고민 없이 특정 방향에 따라 결론을 내는 게 아니냐는 지적도 일각에서 나오고 있다.
◇매출 1~2조 회사에 “5~6조 안정적” 무성의 재판 의혹=대법원 1부(주심 권순일 대법관)는 김모씨 등 한진중공업 노동자 360명이 회사를 상대로 낸 임금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미지급 법정수당 청구는 신의칙에 반한다”는 원심의 판결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고 3일 밝혔다. 대법원 재판부는 그 이유로 “부담할 추가 법정수당은 5억원 상당으로 보이는데 한진중공업의 매출액은 매년 큰 등락 없이 5조~6조원 상당으로 안정적으로 유지됐다”며 “추가 법정수당의 규모는 피고의 연 매출액의 약 0.1%에 불과하며 연간 인건비 약 1,500억원의 0.3% 정도”라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한진중공업이 매년 보유하는 현금성자산도 상당한데 2015년 말을 기준으로 800억원에 이르러 추가 법정수당의 약 160배”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해당 판결문에는 판단 기준을 넘어 기초 사실조차 잘못 파악한 정황이 곳곳에 드러났다. 우선 대법원 1부은 한진중공업의 매출액을 5조~6조원으로 파악했지만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한진중공업은 논란이 된 2008년부터 지난해까지 5조원은커녕 4조원의 매출도 거둔 적이 없다. 나아가 판결문엔 “한진중공업의 매출액은 매년 큰 등락이 없었다”고 판시했으나 한진중공업 매출은 2008년 3조8,480억원을 기록한 뒤 단 한 번의 반등도 없이 2014년 1조7,990억원까지 떨어졌다. 판결 기준점이 된 2015년 2조413억원으로 소폭 늘었지만 이미 1조8,067억원이 증발한 뒤였다. 지난해 한진중공업의 매출액은 1조7,509억원이었다.
5조~6조원이라는 허위 매출액을 기준으로 삼으면서 5억원 상당의 추가 수당 비중도 0.01%가 아닌 0.1%로 잘못 계산한 채 그대로 판결문에 실었다. 더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은 바로 그 다음 줄에 “5억원은 인건비 약 1,500억 원의 0.3% 정도”라고 설명한 부분이다. 조 단위와 천억 단위가 연달아 나옴에도 이를 동일한 기준에서 계산하고 마지막까지 수정하지 않았다. 판결문 작성부터 검토까지 모든 과정이 허술하게 진행됐음을 시사하는 부분이다.
“변론종결일에 가장 가까운 2015년 기준으로 800억원에 이를 만큼 현금성 자산도 충분하다”는 근거도 설득 논리로 빈약하다는 지적이다. 한진중공업 현금성 자산은 2013년 4,461억원이었다가 2014년 2,152억원, 2015년 799억원으로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현금성 자산을 추세가 아닌 특정 시점으로만 판단하고 결론에 유리한 논거로 삼은 셈이다. 자본잠식 직전의 회사인데도 남은 자산만 따진 채 채무에 관한 언급은 전혀 하지 않았다.
◇2심에선 순이익 10배 부풀려 반대 결론=해당 사건은 2016년 상고심에 올라가 무려 3년 동안 심리된 사건이다. 대법원 선고일은 지난 4월23일로 판결이 나온 지도 벌써 열흘이 지났다. 시간이 충분했음에도 기업의 매출액과 매출 추이, 추가 수당 비중 등 ‘경영상 어려움’을 판단하는 핵심 사안들을 허투루 들여다봤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대법원 판결문이 여러 오류 속에 작성된 것이 드러난 이상 다시 치러지는 2심에서도 이 같은 부분이 쟁점화될 것이란 관측이 제기된다.
익명을 요구한 조선업계의 한 관계자는 “한진중공업이 5조원 이상의 매출을 거둔 기억이 전혀 없는데 대법원 판결에 5조~6조원 매출이 안정적으로 유지됐다고 판시돼 놀랐다”며 “경영상 어려움을 따지는 법원 판단에 의심이 생기지만 법원이 모든 칼자루를 쥔 상황에서 어느 기업이 반박할 수 있겠느냐”고 꼬집었다.
한진중공업 통상임금 사건에서 판결문 오류는 대법원뿐만이 아니었다. 지난 2016년 6월 사측의 승리로 결론 난 서울고등법원 2심 판결문에는 한진중공업의 2008~2010년 순이익이 무려 10배나 뻥튀기됐다. 2008~2010년 한진중공업의 실제 당기순이익은 각각 630억원, 519억원, -517억원이었으나 판결문에 삽입된 표에는 6,300억원, 5,190억원, -5,175억원으로 기재됐다. 당시 재판부는 이 통계를 근거로 “한진중공업은 2012년을 제외하면 2010년 이후 계속 큰 폭의 적자를 내고 있었다”며 추가 수당을 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재판장은 공교롭게도 가장 최근인 지난해 12월 대법원에 합류한 김상환 대법관이었다. 2심 판결문부터 잘못된 수치가 제시됐는데 대법원은 이를 바로 잡기는커녕 한술 더 떠 더 많은 오류를 양산한 것이다.
◇첫 상장사 판결 잇딴 오류에 “비상장사 판결은 더 못 믿어”=경영상 어려움을 판단하는 핵심 논거에 오류가 잇따라 확인되자 재계와 법조계 상당수 관계자는 더 이상 신의칙에 관한 법원의 판단을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대법원은 지난 12월 다스, 올 2월과 4월 시영운수·예산교통 통상임금 사건 등에 대해 신의칙 판단을 내리고 모두 근로자 손을 들어줬다. 대법원은 시영운수 사건에 대해 “추가 수당 규모가 시영운수 연간 매출액의 2~4%, 2013년 총 인건비의 5~10% 정도에 불과하다”고 설명했고, 예산교통 사건에 대해 “추가 지급 퇴직금 3,600만원은 회사 연 매출 40억원의 0.9%에 불과하다”는 분석을 붙였다.
문제는 이들은 모두 비상장사였다는 점이다. 공개된 실적이 없어 판결문에서 소개한 자산 규모 등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 신의칙 사건에서 대법원 판결문과 실적을 교차 검증할 수 있는 기업은 상장사인 한진중공업이 처음이다.
법조계 한 관계자는 “일반인도 재무제표를 확인할 수 있는 한진중공업 같은 회사에 관해서도 대법관들조차 엉터리 분석을 내놓는데 실적 자료가 불투명한 비상장사에 대한 논거는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며 “판결문 하나에 기업은 수억 원 이상을 지출하게 되는데 기초 사실도 다 틀린 논리에 누가 승복을 하겠느냐”고 답답해했다.
대법원은 서울경제 취재진의 이 같은 지적에 대해 “다음 주에 대법관 직권으로 판결 경정을 할 것”이라며 “숫자가 달라져도 결론은 같다”고 해명했다. 판결경정이란 판결에 오류가 있는 것이 명백할 경우 내용을 실질적으로 변경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판결문을 바로 잡는 절차를 말한다.
한진중공업은 지난 2008년 8월 체결된 단체협약과 취업규칙에 따라 근로자들에게 두 달에 한 번씩 정기상여금을 지급했다. 영도조선소와 다대포제작소 사업장에서 근무하던 전·현직 근로자들은 2012년 8월 단체협약에서 정한 정기상여금 등이 통상임금에 해당하므로 법정수당을 다시 계산해 추가로 지급해달라며 소송을 냈다.
한진중공업은 사건이 상고심으로 올라가기 직전인 2016년 1월부터 채권단 자율협약을 맺고 구조조정을 진행했다. 현재는 완전자본잠식 상태로 지난 1월 최대 자회사 수빅조선소의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를 필리핀 현지 법원에 신청했다. 올 3월에는 채권단이 6,874억원 규모의 채무를 출자전환하기로 결정하면서 총수였던 조남호 회장이 경영권을 박탈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