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하’는 지하인데 지상인 곳, 한국 특유의 공간이다.” (봉준호 감독)
영화 기생충의 예고편에서 주인공 기택(송강호 분) 가족은 끝없이 하강, 하강하다 땅 아래 반지하로 내려가서야 자신들의 삶터인 집에 비로소 도착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참고로 영화 스포일러 없습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국내 개봉 8일 만인 지난 6일 5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흥행을 잇는 가운데 영화의 주요 무대인 ‘반지하’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커뮤니티와 SNS에는 “나도 반지하 방에서 산 적 있노라”며 기억을 곱씹는 관객들의 후기를 종종 엿볼 수 있는데요. 그만큼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주거형태인 반지하 공간에 한국 사회의 단면을 생생하게 투영한 것이겠죠. 다만 생생함을 넘어 너무 ‘현실적’이라며 영화를 본 뒤 “불편했다”고 말하는 이들도 적지 않은 듯합니다. 실제 반지하 동네는 영화와 얼마나 같거나 또 다른 모습일까요.
■ 기택네 반지하 동네는 어디? 실제 촬영지에 찾아가다
수많은 계단을 내려가면 있는 기택네 반지하 집은 서울에서 흔히 보는 동네를 배경으로 두고 있습니다. 진짜 동네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세트장이었죠. 제작에만 두 달 정도 소요됐습니다. 제작진들은 경기도 일산의 한 스튜디오에 기택네 집 앞 동네를 만들고 CG로 이어붙여 실제 동네처럼 보이게 했습니다.
제작진이 참고한 서울의 실제 동네는 아현동, 성북동, 창신동, 후암동 등 동네와 재개발 구역들입니다. 영화 속 길거리 장면은 실제 동네에서 촬영하기도 했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반지하 동네 중 하나인 아현동의 한 골목을 최근 찾았습니다. 기택의 아들 기우가 친구와 술잔을 기울였던 동네 슈퍼 옆으로 좁은 길이 나 있고 다세대 주택들이 언덕 끝까지 이어졌습니다. 계단을 오르고 오르다 옆을 살피면 어두운 계단 아래로 빨랫줄에 널린 빨래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저 아래에도 사람이 사는구나 싶어 발걸음을 조심스레 옮겼습니다.
영화에서는 계속 계단을 내려가야 했지만 현실에서는 언덕 끝까지 올라야했습니다. 어느새 등에 땀이 줄줄 흘렀죠. 언덕 끝에 다다르니 또다시 세 갈래 길과 계단으로 연결됐고 3, 4층 높이 다세대 주택들이 골목마다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땅바닥에 창문만 빼꼼 내민 반지하 방들이 있었습니다.
■ “살기 좋았는데…” 우범지대로 전락한 우리 동네
언덕 꼭대기의 반지하 집에서 문을 열고 나오는 할머니에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김미자(가명, 84세) 할머니는 이사 온 첫날 심은 나뭇가지가 잎이 무성한 2층 높이 나무로 자랄 만큼 30여 년의 긴 세월을 한 집에서 지낸 동네 터줏대감이셨습니다.
할머니가 처음 이 동네에 이사 왔던 1986년 즈음엔 이곳이 살기 좋은 동네였다네요. 감나무와 호박들이 밭을 이루고 있었고 저 멀리 한강도 내려다보였죠. 그러다 세월이 흘러 외지인들이 들어오고 낙후되면서 조금씩 변했습니다. 술 취한 이가 지나가다 욕설을 해대는 일도 종종 있었고 몇 년 전에는 집 앞에서 살인 사건도 벌어졌었죠. 이후 경찰이 순찰을 돌고 골목마다 CCTV가 설치됐습니다. 그래도 할머니는 병원 갈 때 버스 타러 긴 계단을 내려가야 하는 것 말고는 이 집에서 살며 불편한 점은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다만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고. 할머니는 과거엔 집 앞 계단에 앉아 솔솔 부는 바람 맞으며 한강을 자주 내려다보곤 했었는데, 지금은 아파트 때문에 시야가 가려졌다는 것이었죠. 할머니는 “아파트가 지어질 때 ‘나도 아파트 살고 싶은데’ 그런 생각하기도 했다”며 “그래도 바람이 이렇게 불어오니 명당”이라고 미소를 지으시네요.
얘기를 마치고 식사하러 들어가신다기에 집안을 구경시켜달라고 했습니다. 출입문 뒤로 보이는 좁고 낮은 방은 어둡고 어질러져 있었습니다. 이게 부끄러우셨는지 한사코 못 들어온다며 손사래를 치시네요.
■ 반지하도 천차만별...역세권·대학 근처엔 빈 집없어
성북동으로 가봤습니다. 영화 속 박 사장네(이선균 분)가 살 법한 고급 주택단지 옆으로 깎아지를 듯한 언덕길 곳곳에 다세대 주택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죠. 지면 가까운 곳 벽을 뚫고 나온 보일러 배관이 그곳 아래 사람이 살고 있음을 짐작케 했습니다.
동네의 한 공인중개사는 “반지하가 대부분 지은 지 오래돼 기름보일러 쓰는 집이 아직도 있다”면서 “저렴한 방을 찾는 세입자에게 반지하 집을 소개하면 보지도 않고 거절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는 “그래도 성북동은 언덕이라 반지하는 1층이나 마찬가지”라며 “최근에 연극인 부부가 전세 7,000만 원에 15평 방 2개짜리 방을 계약했다”고 합니다.
요즘은 각종 옵션과 가구 빌트인 시공이 다 돼 있어 저렴한 가격에 살기 깔끔한 반지하 집들이 있다는군요. 마침 영화를 봤다는 그는 “현실적인 반지하 동네 느낌보다는 여기저기서 짜깁기해 과장된 느낌이 들었다”고 덧붙였습니다.
망우동에서 만난 부동산업자는 “마침 반지하 집 계약한 아기 1명 있는 20대 신혼부부가 있다”며 “전세 5,500만 원에 방 세 개 짜리 넓은 집”이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는 “반지하 자체는 살기 좋다고 못하지만, 동네는 다들 살기 좋다고 한다”며 “인근에 망우역도 있고 대형마트와 영화관도 가까워 동네가 괜찮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문동의 한 부동산업자 역시 “이 동네는 역세권에다 대학 근처이고, 방도 500만 원에 월세 30만 원 정도로 저렴해 빈집은 거의 없는 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에서 관리하는 33㎡(7평)짜리 반지하 집에 이사 올 준비를 하고 있던 박정근(가명, 50대) 씨를 만났습니다. 집에 들어가 봤더니 벽지와 장판 수리가 한창입니다. 화장실도 좁지만 깔끔했죠. 박 씨는 “계단 세 개만 내려오면 돼 사실상 1층이나 다름없다”며 “보증금 100만 원에 월 5만 원만 내면 이 집에서 살 수 있어서 좋다”고 설명했습니다. 박 씨에겐 이곳이 햇빛도 잘 들어오는 따뜻한 보금자리였습니다.
대부분의 부동산업자들은 “반지하에 살고 싶어서 사는 사람들은 없다”고 입 모아 말했습니다. 그러나 반지하 주택 덕분에 좋은 위치에 저렴한 집을 얻은 사람들에게는 꽤 괜찮은 안식처인 셈이네요.
■ 한국인만 반지하에 사는 이유는?
국토교통부 2017 주택실태조사에 따르면 반지하 거주 가구가 전체 2%로 38만 2,000가구 가량 됩니다. 가구당 2명 혹은 3명씩 거주한다고 하면 전국에 80만 명 정도가 아직 반지하에 거주하는 셈이죠.
반지하는 과거 1976년 늘어나는 주택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정부가 다가구·다세대 주택의 지하층 개발을 합법화하면서 급속히 확산했습니다. 건축주들은 제한된 층수에서 1개 층을 더 만들 수 있으니 이득, 수요자들도 저렴한 집이 늘어나니 좋았죠. 그리하여 ‘반지하’는 봉준호 감독이 말했듯 서민을 상징하는 한국 특유의 공간으로 자리매김합니다. 영화 번역가 달시 파켓 씨가 ‘반지하’에 맞는 영어 단어를 못 찾아 애를 먹었다고 하죠.
그러나 잦은 침수 피해와 열악한 생활 환경, 각종 범죄의 위협에 노출되면서 점차 반지하 건물 신축이 규제되기 시작했고 현재는 정상적인 주거 시설에 입주할 수 없는 서민들의 최후의 생활 공간으로서 남아 기능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통계에 따르면 반지하와 함께 옥탑, 고시원 등에 사는 일명 ‘지옥고’ 거주 가구는 전국 110만가구(5.7%)에 달합니다. 정부 노력으로 해마다 개선되는 추세이긴 하나 여전히 많은 이들이 열악한 곳에서 살고 있죠. 국토부는 올 하반기에 1인 가구 증가와 생활 수준 향상 등 시대를 반영한 새로운 최저주거기준을 마련키로 하고 논의 중에 있습니다.
부디 내년에는 영화 속 기택네 가족 뿐 아니라 문광(이정은 분)네 가족도 웃을 수 있는 정책 환경이 마련될 수 있길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