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희망 직업에 유튜버가 등장하고 동영상 광고 시장이 1년 새 40% 이상 성장하는 영상의 시대. 일찌감치 자신만의 스타일이 담긴 영상으로 광고와 뮤직비디오 업계를 사로잡은 크리에이터가 있다. 바로 한국의 대표적인 뮤직비디오 감독이자 ‘플립이블(Flipevil)’ 프로덕션 대표인 서동혁 감독(35)이다. 그의 손을 거친 엑소, 블랙핑크, 레드벨벳과 박재범, 김하온, 악동뮤지션, 딘(DEAN), 힙합 크루 VMC 등 유명 아이돌과 아티스트의 뮤직비디오들은 통합 10억 5,000만이라는 유튜브 조회 수를 달성했다. 예능 프로그램을 즐겨보고 만화책을 사랑했던 평범한 소년은 어떻게 한국을 대표하는 영상 크리에이터가 되었을까? 서동혁 감독을 만나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봤다.
만화책 탐독했던 소년, 뮤직비디오 감독 되다 |
Q. 어렸을 때 꿈은 무엇이었나?
A. 고등학생 때부터 재밌는 걸 좋아해서 예능PD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대학교에 들어가 방송학을 전공했다. 근데 꿈은 꿈이고 직업을 갖는 데는 개인 성향이 영향을 끼친다. 음악을 워낙 좋아하고 만화책과 독특한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해서 뮤직비디오 제작이 적성에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그쪽 일을 시작했다.
Q. 어떤 곳에서 일했나?
A. 대학교 졸업작품으로 단편영화를 만들면서 모션그래픽(비디오나 애니메이션에 쓰이는 기술로 사진이나 그림에 움직임을 더하는 영상 디자인 분야)에 관심이 생겼다. 지금은 이 분야가 많이 알려졌지만, 당시에는 생소한 분야였다. ‘이걸로 취업도 수월히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졸업 후 ‘VDAS’라는 교육기관에서 모션그래픽과 영상 디자인을 공부했다. 그 후 관련 국내 회사에 취직해 2년 반 동안 열심히 일했다. 혼자서 만든 영상 작품을 비메오(동영상 공유 웹사이트)에 올리기도 했다. 그게 외국에 알려지면서 여러 외국 회사에서 이직 제안이 왔고 뉴욕에 위치한 ‘Inwindow Outdoor’라는 미디어 파사드(건물 외벽에 다양한 콘텐츠 영상을 투사하는 것) 회사에서 일하게 됐다. 29살 때였다.
Q. 뮤직비디오 제작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언제인가?
A. 미국에 갔을 때 처음엔 성취감을 느껴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허무했다. 세계에서 영상을 제일 잘 만든다는 회사에 들어간다 해도 예상되는 그림이 뻔했다. 직장인으로서 목표를 잃었던 거다. 미국에서 프리랜서로 일하기엔 비자 문제 등 제약이 많았다. 마침 ‘VM프로젝트’ 소속 조범진 감독이 뉴욕에 놀러 왔다. 지금은 VM프로젝트가 내로라하는 K-POP 아이돌 뮤직비디오 대부분을 만들면서 유명해졌지만 당시에는 막 성장하던 때였다. 조범진 감독과 의기투합해서 일하기로 결심했고 한국으로 건너와 ‘로우런더리’라는 프로덕션을 만들었다. 그간 방송과 모션그래픽을 공부했던 경험과 음악과 만화책, 미술을 통해 쌓아온 취향이 뒤섞이며 광고와 뮤직비디오를 만들 때 시너지 효과가 났다.
Q. 기존 뮤직비디오 시장을 뚫기 힘들지 않았나?
A. 확실히 시장 진입장벽이 낮진 않았다. 그런데 딱히 고민하지 않았다. 처음 회사를 설립하고 일을 시작했을 때는 의뢰가 잘 안 왔다. 상업영상이든 인디 뮤직비디오든 조그만 프로젝트라도 꾸준히 하면서 비메오 같은 영상 공유 플랫폼에 포트폴리오를 쌓아 나갔다. ‘이 사람 잘 만드는구나’라는 인식이 업계에 퍼지면 된다.
1~2년은 수익 포기하고 실력 쌓았죠 |
Q. 회사를 따로 설립하게 된 이유는?
A. 아이돌 뮤직비디오를 만들 때 공식이 있다. 인물을 예쁜 각도로 찍어야 한다든가 춤 비중은 어느 정도여야 하는지 등 정해진 규칙이 있다. 그걸 반복하다 보니 내 스타일의 영상을 만들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로우런더리 프로덕션을 그만두고 새로 ‘플립이블’이라는 프로덕션을 차렸다. 감독 3명과 제작자 1명으로 구성됐다. 한 1~2년은 돈을 포기하고 실력을 쌓았다. 대중적인 영상보다 예술적인 영상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프로덕션 이미지를 쌓아가는 중요한 과정이었다.
Q. 플립이블 뜻은 무엇인가?
A. ‘바텐더’라는 일본 만화가 있다. 바텐더에 오는 손님들 이야기를 에피소드로 묶은 책인데 재밌다. 바텐더가 손님 얘기를 들어주고 그 사람이 처한 상황에 어울릴 만한 술을 권해준다. 어느 날 일본 야쿠자였나 나쁜 일을 하는 손님이 바에 찾아온다. 그러면서 ‘나는 다른 사람에게는 악인이지만 그냥 살아가는 거야’라고 말한다. 바텐더는 그 손님에게 ‘EVIL’이라는 글자를 써주며 이 단어를 뒤집으면 ‘LIVE’, 즉 산다는 의미가 되니 여의치 말고 살아가라고 조언해준다. 이걸 읽고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EVIL 앞에 ‘뒤집는다’는 의미의 ‘FLIP’을 붙였다. 남들 시선 신경 쓰지 않고 살려고 한다.
Q. 뮤직비디오를 만들면서 힘들었던 적은?
A. 래퍼 넉살이 소속된 힙합 크루 VMC의 ‘티키타카’를 만들 당시 몸이 너무 안 좋았다. 촬영 둘째 날 허리디스크가 터져 촬영을 못 갔다.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가서 병상에서 휴대폰으로 연출 지시를 내렸다. 퇴원 후 진통제 맞고 약 기운에 취해 영상 편집해서 결국 완성했다.
박재범 ‘YACHT’ 뮤직비디오 영상./flipevil 비메오 |
Q. 다양한 영상 장르를 시도하는 이유는?
A. 개인 성향이 일에도 반영된 것 같다. 축구게임 할 때 스피드가 뛰어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슈팅력이 특출한 선수도 있듯 뾰족한 능력치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 과거 특정 업무를 집중해서 해보니 한 분야에서 탁 튀는 사람보다 전체적으로 균형이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플립이블을 세운 후 1~2년 동안 다양한 분야의 영상을 만들면서 훈련했다.
Q. 기억에 남는 뮤직비디오 작업은?
A. 아이돌뿐만 아니라 진짜 멋있는 아티스트와 작업하고 싶었다. 그때 목표가 박재범이었다. 그런데 1년 만에 박재범 씨한테서 연락이 왔다. ‘YACHT’ 뮤직비디오 의뢰였다. 제작 회의 때 박재범 씨가 여름 노래니 시원한 분위기로 물 위에서 춤추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그런 요청을 받을 때 보통 바다를 떠올리기 쉽지만 바다에서 촬영하면 예산이 많이 든다. 그래서 미디어 파사드 기술을 이용해 세트장 바닥에 물을 깔고 빔 프로젝터를 이용했다. ‘제임스 터렐’이라는 유명한 조명작가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이미지를 구축했다. 새로운 방식이지만 박재범 씨가 준 미션은 완수한 거다.
“영상 제작자, 나무도 보고 숲도 봐야” |
Q. 영상을 만들 때 영감은 주로 어디서 얻는가?
A. 아무 데서나 영감을 얻는다. 영화나 만화 볼 때, 길을 걸을 때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한다. 아이돌 뮤직비디오 같은 경우 음악 그 자체가 주는 느낌을 바탕으로 콘셉트를 정한다.
Q. 보통 광고나 뮤직비디오는 어떻게 제작되는지?
A. 큰 규모의 영상 제작 과정은 비슷하다. 영상이 필요한 광고주나 기획사가 있다. 분야마다 다를 수 있는데 광고주가 있으면 광고주의 의지를 집행하는 대행사가 있다. 대행사가 필요에 따라 또 다른 대행사에 일을 맡길 수도 있고 아니면 연출제작을 총괄하는 우리 같은 프로덕션에 일을 의뢰하기도 한다. 영상 하나를 제작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단계가 많다. 실무진들이 어려워하는 부분 중 하나다. 제작팀 같은 경우도 촬영팀, 조명팀, 미술팀 등 역할이 세분돼 있다. 팀 안에서도 퍼스트와 세컨드 역할이 있다. 그게 시스템상 효율적이기도 하다.
부산 토박이 래퍼 제이통의 ‘오직 직진’ 뮤직비디오./flipevil 비메오 |
Q. 책임 제작자로서 중요한 능력은 무엇인가?
A. 영상 하나가 탄생하기까지 무수히 많은 스텝의 손이 필요하다.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봐야 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연출자는 ‘나무도 보고 숲도 봐야’ 한다. 촬영장에 가면 모든 게 복잡하다. 편집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러면 내 눈앞에 당장 펼쳐진 상황이나 그때 찍고 있는 장면에만 몰입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연출자는 제작 흐름을 이끌어 나가야 한다. 전체를 보는 능력이 중요하다.
Q. 개성을 지키면서 대중적인 영상을 만드는 비결은?
A.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과 내가 하고 싶은 것 사이의 균형이 필요하다. 유니크한 콘텐츠를 접하면 ‘힙하다’고 하듯 자기만의 색깔을 갖는 게 중요하다. 개성과 대중이 원하는 코드를 조화롭게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아이돌 뮤직비디오를 만들 때는 대중이 좋아하는 방식 90%, 개인적인 스타일 10% 비율로 제작한다. 반면 제이통의 ‘오직 직진’ 같은 아티스트 뮤직비디오 경우 개성 80%, 대중성 20% 비율로 만든다. 그 사이를 왔다 갔다 조절할 수 있는 게 능력이고 내공이다.
Q. 좋아하는 크리에이터가 있나?
A. ‘슬램덩크’를 쓴 일본 만화가 다케히코 이노우에를 좋아한다. ‘슬램덩크’는 정체성을 확립해준 만화였다. 그 작가는 ‘배가본드’라고 일본의 유명한 검호 미야모토 무사시 일대기를 쓰고 장애인 농구 만화도 그리는 등 이것저것 많이 한다. 그의 작업물을 보면 본인 스타일이 확고해서 멋있다. 영화 ‘인셉션’, ‘다크 나이트’를 만든 크리스토퍼 놀란도 좋아한다. 그 감독 영화는 판타지적 요소를 현실감 있게 그려 모든 게 진짜 같다. ‘기 부르댕’이라는 사진작가 작품도 느낌이 좋아 많이 본다.
Q. 인생 목표가 있다면?
A. 50~60대까지 영상 일을 하고 싶다. 광고랑 뮤직비디오, 개인 작업도 조금씩 하면서 균형을 지키며 오래 일하는 것. 영상 시장이 워낙 빨리 변해 쉽진 않을 거다. 그래서 새로운 걸 익히려고 개인작품도 꾸준히 만든다.
진입장벽 낮아진 영상산업, 많이 만들어 보면서 실력 키워야 |
Q. 영상 콘텐츠가 인기를 끄는 이유는 뭘까?
A. 영상 매체 자체가 기본적으로 굉장히 직설적이고 직관적이다. 그래서 사람을 집중하게 한다. 그게 영상이 가진 힘이다. 그래서 광고주들이 사용하기 좋다. 또 영상 장비가 점점 가벼워지고 있지 않은가. 옛날에 영화 보려면 극장에 가야 했는데 기술이 발전해서 텔레비전으로 보는 시대가 왔다. 요새는 휴대폰으로 영상을 본다. 점점 미디어가 휴대하기 쉬워지고 있다. 영상을 만들기 위한 진입 장벽이 낮아지면서 수요도 많아지고 더 발전하는 것 같다.
Q. 뮤직비디오 제작 수업을 열어 후학을 양성하는 이유는?
A. 과거 VDAS라는 교육기관에서 모션그래픽과 영상 디자인을 공부했는데 인생에서 큰 전환점이었다. 엄청나게 고마운 곳이라 보은하고 싶었다. 마침 교수님께서 영상 수업을 맡기셨고 흔쾌히 받아들였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오히려 내 실력이 많이 늘었다. 막연히 멋있다고 생각한 게 왜 멋있는지 학문적으로 알게 됐다. 수업 들은 학생 중 큰 뮤직비디오 프로덕션에서 조감독 생활을 하는 친구도 있고 프리랜서로 자기 작품을 만드는 친구도 있다.
서동혁 감독이 진행하는 영상 제작 수업 홍보 영상./VDAS제공 |
Q. 수업을 들으면 뮤직비디오를 만들 수 있는가?
A. 수업이 끝날 때쯤 학생들과 뮤지션들을 연결해준다. 홍대 인디씬에 있는 아티스트 중에는 뮤직비디오가 필요한 친구들이 있다. 한편 수강하는 학생들은 자신의 작품을 만들고 싶어 하니 서로 연결해주면 좋을 것 같아 그런 시스템을 만들었다.
Q. 영상 창작자를 꿈꾸는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A. 만들고 싶은 게 있으면 무조건 만들어 봐라.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다 무용지물이다. 특히 영상 제작을 처음 시작할 때는 질보다 양으로 밀어붙여야 한다. 이것저것 만들면서 배우는 게 많기 때문이다. 또 실력이 중요하다고 얘기했지만 무엇보다 본인이 즐겨야 한다. 영상 분야 쪽은 일로 접근하면 지옥이다. 재밌는 게 첫 번째 조건인 것 같다.
/황민아 인턴기자 nomad@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