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오늘의 경제소사] 1962년 롤링스톤스 첫 공연

문화경쟁력이 곧 상업경쟁력

지난 2015년 6월23일 밀워키 마커스 엠퍼시어터에서 진행된 롤링스톤스의 서머페스트 페스티벌 공연 모습./위키피디아지난 2015년 6월23일 밀워키 마커스 엠퍼시어터에서 진행된 롤링스톤스의 서머페스트 페스티벌 공연 모습./위키피디아



1962년 7월12일, 영국 런던 옥스퍼드가 마키 클럽. 대학생들이 주 고객인 클럽의 무대에 20대 초반 청년들로 구성된 밴드가 올랐다. 2시간 넘게 이어진 공연에서 청년들은 18곡을 불러 관객들의 호응을 받았다. ‘비틀스’와 더불어 시대를 풍미한 영국 출신 록밴드 ‘롤링스톤스(The Rolling Stones·사진)’가 이렇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도 현역으로 활동하는 롤링스톤스의 장수 비결은 다양하고 뛰어난 음악성과 이미지 마케팅. 반전(反戰)과 자유를 희구하던 시대에 악동 이미지로 대중에게 다가섰다.


출발은 두 친구의 우연한 재회에서 비롯됐다. 경제학도인 믹 재거와 음악도인 키스 리처드가 기차를 기다리다 만나 음악 얘기를 나눈 게 그룹 결성으로 이어졌다. 열여덟 살 동갑으로 초등학교 시절 단짝이던 이들은 베이스 기타를 영입해 ‘리틀 보이 블루 앤 블루 보이스’라는 이름의 밴드를 결성, 본격적인 연습에 들어갔다. 추가로 3명을 더 끌어들여 6명을 꾸릴 즈음 첫 공식 공연 제의가 들어오고 팀 이름을 ‘롤링스톤스’로 바꿨다. 도약의 계기를 맞은 것은 차별화. 새 매니저의 제안대로 거친 연주와 자유분방한 무대 매너를 선보이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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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스의 홍보 담당 출신인 새 매니저는 악동 이미지를 부각하기 위해 청순한 인상을 가진 멤버를 퇴출시키며 팀원도 줄였다. 영국 출신 밴드들이 대거 미국 시장에 진출한 ‘브리티시 인베이전(British Invasion)’ 시대였던 1960년대 중반 롤링스톤스는 미국 흑인 음악과 블루스, 재즈와 포크송까지 결합하며 절정기를 맞았다. 1969년 말 롤링스톤스가 미국의 고속도로에서 시도한 무료공연도 문화사의 변곡점으로 남아 있다. 30만 관객이 운집해 흥분한 가운데 흑인 한 명이 롤링스톤스 경호팀이 휘두른 흉기에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살해당한 흑인이 총기를 쓰려 했다는 증거가 나왔어도 팀 전체가 미국에서 추방당하고 영국 록그룹들이 주도했던 ‘히피문화’도 이 사건을 정점으로 내리막길에 들어섰다. 사건의 충격과 팀원 간 불화, 마약 투약으로 휘청거리면서도 꾸준하게 활동해온 롤링스톤스는 2012년에는 데뷔 50주년 기념 세계 순회공연을 했다. 현역 최장수 록밴드인 이들이 벌어들인 누적수입은 1조원대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의 청년들도 마침내 이런 기회를 맞았다. 경제적 가치가 5조원 이상이라는 방탄소년단이 롤링스톤스 이상으로 롱런하기 바란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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