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최저임금이 전년 대비 2.87% 오른 시급 8,590원으로 결정되면서 오는 2020년까지 최저임금을 시간당 1만원까지 올린다는 문재인 정부의 대선공약이 사실상 폐기됐다. 최저임금 인상의 피로감을 호소한 사용자 측의 목소리가 크게 반영된 결과다. 대외적으로 미중 무역마찰, 일본의 무역보복 등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고 고용지표나 경제성장률·물가상승률 등 경제지표가 부진한 상황을 최저임금위원회가 외면할 수 없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당초 동결이나 삭감을 주장했던 경영계는 업종별·규모별 차등적용, 주휴수당제 개편 등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를 키우고 있다. 하지만 업종별 차등적용은 역대 한 번도 이뤄진 적이 없고 사업체 규모별 차등적용은 법 개정이 필요한 사항인데다 노동계의 반대가 완강해 난항이 예상된다.
◇경제환경 악화 반영…인상률 제한=이번 최저임금 심의 과정은 처음부터 낮은 인상률에서 결정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최근 2년 연속으로 두자릿수 인상률을 보이며 영세자영업자·소상공인을 중심으로 피로감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올 1·4분기 경제성장률이 전년 동기 대비 1.7%에 그친 반면 연간 물가상승률은 1%대로 전망돼 저인플레이션 우려가 나오고 있다. 특히 지난해부터 이어진 고용지표의 부진이 최저임금 인상 탓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고용노동부가 한국고용노사관계학회에 의뢰한 집단심층면접(FGI) 연구 결과 최저임금 인상 후 도소매업과 음식숙박업 등 취약업종에서 고용을 줄인 것으로 나타났다. 박준식 최저임금위원회 위원장도 이날 기자회견에서 내년도 최저임금안에 대해 “경제여건에 대한 정직한 성찰의 결과라고 생각한다”며 “우리가 직면한 현실에서 좀 더 유연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반영된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내년 최저임금 수준을 놓고 물가상승률 수준과 내년 상여금·복리후생비의 최저임금 산입범위가 더 늘어나는 점을 고려하면 사실상 동결이라는 평도 있다. 김성희 산업노동정책연구소장은 “저임금노동자 사이에서는 내년 실질임금이 깎이는 사례도 많이 나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부 안팎에서 계속 제기된 속도조절론도 공익위원을 중심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공교롭게도 이날 결정된 인상률이 최근 청와대와 여권에서 흘러나온 2~3%설과 정확히 들어맞았다. 결과적으로 경제 상황 등은 제쳐 둔 채 그저 정권의 의지에 따라 최저임금 수준이 널뛰기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이는 최저임금위가 매년 노사 간 극심한 대립 속에 파행을 겪는 가운데 사실상 정부가 임명한 공익위원들이 임금 수준을 결정하는 구조 탓에 인상폭이 오락가락할 수 밖에 없다. 결국 최저임금이 보다 안정적으로 운영되기 위해서는 결정의 중립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올해도 그대로 드러냈다는 얘기다.
◇엇갈린 노사 반응… 勞 “참사” 使 “아쉽다”=낮아진 내년도 최저임금의 인상률만큼 노사의 반응도 극명하게 엇갈렸다. 민주노총은 “‘최저임금 1만원’이라는 시대정신을 외면한 결정을 넘어 경제공황 상황에서나 있을 법한 실질적인 최저임금 삭감 결정”이라며 “문재인 정부가 최저임금 포기와 소득주도 성장 폐기를 선언했다”고 평가했다. 한국노총도 “최저임금 참사”라며 “노동존중정책, 최저임금 1만원 실현, 양극화 해소는 완전 거짓 구호가 됐다”고 논평했다. 반면 경총은 “지난 2년간 과도한 최저임금 인상에 따라 모든 기업이 겪고 있는 고통과 경쟁력 하락, 불안한 내년 경제 전망 등 대내외의 복합적 요인을 고려할 때 내년 최저임금은 동결 이하에서 결정되는 것이 순리였다”고 지적했다. 또 “향후 최저임금 결정은 국제경쟁력과 경제 논리만으로 검토해나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차등적용 등 주장 커질 듯=경영계의 최저임금제도를 향한 다음 타깃은 업종별·규모별·지역별 차등적용과 월 환산액의 병기 삭제다. 사용자위원들은 지난 2일 전원회의에 복귀하며 최저임금위 산하에 이들 사안을 다룰 위원회를 만들 것을 주장한 바 있다. 박 위원장도 “최저임금위를 중심으로 제도의 전반적인 검토와 개선을 위한 위원회를 별도로 추진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다만 위원회를 만들려면 노사·공익위원이 모두 동의해야 한다. 노동계가 차등적용과 주휴수당 폐지에 강하게 반대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논의 자체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강훈중 한국노총 대변인은 “업종별로 차등화하면 사용자들의 합의가 불가능하고 지역별로는 우리나라 땅덩이도 좁은데 말이 안 된다”고 반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