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내 송환돼 11년 만에 재판을 재개한 고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의 넷째아들 정한근씨처럼 형사재판을 받다가 잠적해 구속영장이 발부된 피고인들이 상당한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이들의 검거에 대한 책임 소재가 명확하지 않고 검거 전담 인력도 없어 ‘사각지대’로 방치된 게 현실이다.
28일 대법원과 대검찰청에 따르면 형사재판 불출석으로 구속영장이 발부된 피고인 전체 현황과 숫자를 어느 쪽도 관리하거나 파악하지 않고 있다. 이는 현행 사법체계에서 불출석 피고인 검거에 대한 책임 소재가 명확하지 않은 탓이라는 분석이다. 피고인이 재판에 수차례 불출석하면 판사는 직권으로 구속영장을 발부하고 검찰에 집행을 위임한다. 공판의 진행은 법원의 몫이지만 이를 위한 구속영장의 집행은 검찰의 힘을 빌리는 것이다.
그러나 검찰은 불출석 피고인을 검거하는 전담 인력을 두고 있지 않다. 검거가 미진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따로 검거에 나서지 않는다면 지명수배를 통해 경찰 검문 등에서 잡히기만을 기다리는 방법 뿐이다. 가끔 법원 재판부나 검찰의 공판검사가 중요 사건에 대해 검거를 강력 요청하면 집행과에서 검거에 나서긴 하지만 드문 상황이라고 한다.
이와 달리 수사받는 도중이나 재판이 확정된 뒤에 잠적한 사람들에 대해선 검찰에 검거 전담 인력이 있다. 수사 단계에서 도주한 피의자는 사건과에, 형이 확정된 자유형미집행자는 집행과에 전담 수사관을 두고 명단을 관리한다. 검찰 관계자는 “자유형미집행자는 검거 실적이 검찰청 차원에서 관리되기 때문에 검거에 사활을 걸지만 공판 불출석자는 실적에 해당되지 않는다”며 “판사들 역시 불출석자에 대해 구속영장을 발부한 뒤엔 그저 기일을 연기하며 검찰이 잡아오기만을 기다리는 모습”이라고 말했다.
법원 역시 불출석 피고인 검거를 위한 전담 인력을 따로 두고 있지는 않다. 검거가 정 필요하면 법원이 나설 수 있지 않냐는 의견도 있다. 형사소송법 제81조 제1항·제2항에 따르면 급속을 요하는 경우 재판장, 수명법관 또는 수탁판사는 법원사무관 등에게 구속영장의 집행을 명하고 지휘할 수 있다. 다만 법원 측은 ‘급속을 요하는 경우’는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며, 기본적으로 구속영장은 검찰에 집행 책임이 있다는 입장이다.
이같이 피고인 불출석으로 상당수 재판이 공전하는 가운데 형사공판 장기미제사건도 꾸준히 증가 추세다. 2017년7월 검찰이 배출가스 인증서 조작 혐의 등으로 기소했으나 이후 돌연 독일로 출국해 현재까지 재판이 멈춰선 요하네스 타머 전 아우디폭스바겐 코리아 사장 사건이 대표적이다. 형사공판 1심 중에서 2년 넘게 결론이 나지 않고 있는 사건은 지난 6월 기준 2,105건이다. 2014년 말 1,410건 이후 계속해 늘고 있다.
이 때문에 사법체계가 구멍이 난 상태를 법원·검찰 양측이 책임 떠넘기기로 방기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사건 피해자들은 그저 재판부에 “빨리 잡아와서 재판하라”는 민원을 제기하고는 한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만약 도주 기간이 25년이 넘어가면 재판 시효마저 만료된다.
일부 검찰청은 불출석 피고인 증가로 공판 진행에 애로가 생긴 나머지 자체적으로 여러 과의 직원들을 동원해 ‘공판정 불출석 피고인 검거 TF’를 구성하기도 했다. 광주지검의 경우 TF를 통해 지난 4월부터 최근까지 불출석 피고인 32명을 검거했다. 하지만 해당 검찰청에는 아직도 구속영장이 발부된 피고인이 70여명 남아 있는 상태다.
법조계에서는 불출석 피고인 검거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고 전담 인력을 배치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판사 출신 한 변호사는 “판사들도 피고인 불출석으로 재판이 파행돼 다른 재판 일정 관리까지 차질을 겪고 있다”며 “어느 기관에든 검거 전담 인력을 둘 필요가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