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문제를 정치적, 경제적으로 악용하고 예술에까지 영향을 미치려 해서는 안 된다.’
우리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판결에 대해 일본이 지난 2일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수출심사우대국가)에서 제외하며 경제적 보복을 감행한 데 이어 예술적 탄압까지 전개하는 형국에 미술계가 우려하고 있다.
일본 최대 국제미술제로 꼽히는 ‘아이치트리엔날레 2019’의 실행위원회는 지난 3일 극우·보수세력의 협박으로 인한 사무국의 심각한 고충을 이유로 특별기획전 ‘표현의 부자유, 그 후’ 전시 전체를 ‘중단’한다고 전격 발표했다. 지난 1일 아이치(愛知)현 나고야(名古屋)시 아이치현문화예술센터에서 전시가 개막한 지 사흘 만의 일이다. 이에 대한 반발로 미술제 참여작가 상당수가 ‘전시 보이콧’ 의사를 보이고 있어 행사 전체가 위기에 처할 상황이다.
‘표현의 부자유’ 전시는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 그간 외압과 제재로 제대로 전시되지 못했던 작품들을 한 자리에 모아 선보였다. ‘평화의 소녀상’은 지난 2012년 도쿄도립미술관에서 20cm 크기의 모형 소녀상으로 전시될 예정이었으나 ‘정치적 표현물’이라는 이유로 철거된 바 있다. ‘평화의 소녀상’ 옆에는 20년 간 위안부 피해자들만을 촬영해 온 사진작가 안세홍의 ‘겹겹’ 연작도 걸렸다. 안 작가는 지난 2012년 도쿄 니콘살롱에서 ‘겹겹-중국에 남겨진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라는 제목의 사진전을 열려다 개막 직전에 전시를 거부당했고, 소송까지 강행해 전시를 열었다. 이번 전시에는 위안부 피해를 다룬 한국작가 외에도 일본 천황을 정면으로 비판한 일본작가 등이 참여했다.
전시 중단 조치로 4일부터는 미술관 8층 안쪽에 마련된 ‘표현의 부자유’ 전시장에 흰색 가벽이 설치됐다. 현장을 방문한 한 미술관 관계자는 “어제까지는 전시장 입구에 사진촬영금지와 SNS 게재금지의 경고문구가 있었는데 오늘은 흰벽이 가로막고 섰다”면서 “전시장 주변에서 현장을 취재하려는 기자들을 여럿 목격했다”고 전했다.
◇‘표현의 부자유’ 선언인가=이번 ‘전시 중단’ 조치에 대해 예술계는 즉시 반발했다. 아이치 트리엔날레 본전시에 초청된 박찬경,임민욱 등 한국 작가는 물론 ‘표현의 부자유’ 전시와 무관한 본전시 참여작가들도 ‘전시 거부’ 의사를 전하고 있다. ‘표현의 자유’를 억압당한 예술가들의 반발이다.
임민욱 작가는 이번 전시에 지난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의 작가상에 선정됐을 당시 선보인 작품 ‘절반의 가능성’을 재편집한 신작 ‘아듀 뉴스(Adieu News)’를 출품했다. 미디어가 감정을 선동하던 시대에 안녕을 고하며 정보와 공동체의 범주에 대해 묻는 작품으로 일본어 제목은 ‘뉴스의 종언’으로 번역됐다. 임민욱은 4일 서울경제와의 통화에서 “한일갈등 때문에 예술이 정치적 도구로 이용되는 것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검열에 대항하는 ‘표현의 자유 문제’에 작가로서 침묵할 수 없다”면서 “어제 담당 큐레이터와 예술감독에게 이메일을 보냈고 ‘평화의 소녀상’이 전시되지 못한다면 내 작품도 철수하겠다는 입장을 전했다”고 말했다. 임 작가는 자신의 결정이 반일(反日)감정 때문이 아니라 ‘표현의 자유’에 관한 것임을 강조하며 “전시 중단과 관련해 일본작가들도 안타깝고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다”면서 “곧 참여작가들이 어떤 형식으로든 입장을 밝힐 것”이라고 전했다.
미술제 본전시에 영상작품 ‘소년병(Child Soldier)’를 출품한 박찬경 작가는 “‘표현의 부자유, 그 후’ 전시가 중단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간밤에 예술감독과 수석큐레이터에게 이메일을 보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전시는 용납될 수 없다고 항의했다”면서 “항의의 표시로 내 작품 ‘소년병’도 철수하라고 전했다”고 말했다. 박 작가는 “한일 정치갈등 이전에 ‘표현의 자유’를 주제로 한 전시를 중단시킨 사실이 문제”라며 “검열과 검열에 관련된 사회적 협박에 굴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평화의 소녀상’의 김운성 작가는 “일방적으로 전시 중단 통보를 받은 상황”이라며 “전시 큐레이터를 비롯한 실행위원들이 전시 중단의 중지를 요청하는 가처분신청 등 법적 대응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전시 중단 및 작품 철거에 반대하는 일본어 온라인 서명운동도 SNS를 통해 확산되는 중이다. 시인·소설가 등 1,000여 명이 가입한 일본 펜클럽은 “창작과 감상 사이에 의사를 소통하는 공간이 없으면 사회의 추진력인 자유의 기풍도 위축된다”라는 내용의 항의 성명서를 3일 발표했다. 사카구치 쇼지로 히토쓰바시대 법학 교수는 “일본 사회가 편협하고, 타인의 가치관을 인정하지 않게 됐다”며 “정치와 문화는 분리해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도나미 고지 와세다대 명예교수는 “소녀상 등의 설치가 불쾌하다는 이유로 전시를 그만두게 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에 반하고, 비판이 강하다는 이유로 주최 측이 전시를 중단하는 것도 용납할 수 없다”며 “혼란을 이유로 중단하는 것은 반대파의 의도대로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블랙리스트’ 작동하나=지난 1일 전시 개막과 동시에 일본 정부 인사들과 우익 세력은 예민하게 반응했다. 다음 날인 2일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정례 회견에서 “(행사에 대한) 정부 보조금 교부 관련 사실관계를 조사해 적절히 대응하겠다”고 압박했다. 이날 전시장을 방문한 가와무라 다카시 나고야 시장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실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망언을 내뱉었다. 결국 아이치트리엔날레 실행위원장을 맡고 있는 오무라 히데아키 아이치현 지사는 “전시에 항의해 가솔린 탱크를 몰고 오겠다는 팩스 등 메일과 전화로 사무국이 마비될 지경”이라는 이유를 들어 “행사의 원활한 운영까지 제반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했다”면서 전시 중단을 전격 지시했다.
아이치트리엔날레는 정부와 지자체의 예산 지원이 끊기면 운영 자체가 위태로운 것이 사실이다. 여기다 해외 홍보까지 위축됐다. 일본국제교류기금은 아이치트리엔날레 홍보를 위해 지난 달부터 해외 언론 초청 행사를 추진했으나 지난 2일 오후 전격 중단했다. 표면적으로는 “같은 시기에 미술 분야를 취재하는 같은 취지의 방문 계획이 있어 사업이 중복된다”는 것이 취소 사유였으나 공교롭게도 아이치트리엔날레에 대한 일본 정부의 압박이 급박하게 전개되던 시점이라 의혹을 떨치기 어렵다. 일본국제교류기금은 3년마다 열리는 아이치트리엔날레를 외국 언론에 알리기 위한 홍보행사를 매번 진행해 왔다.
미술평론가 김준기 씨는 “‘평화의 소녀상’ 등은 위안부 고통을 위로하기 위한 평화예술이자 사회예술이었던 것인데 이를 정치적 시선으로 보고 매도한 것은 오히려 일본 정부였다”면서 “예술의 사회적 기여를 정치적으로 몰아가는 행위는 중단돼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