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중반인 박동규(가명)씨는 지난해 정리해고를 당한 것이 억울했다. 자존심도 크게 상했다. 그래서인지 가족이나 지인들과 대화하다가 무시를 당한다고 느끼면 곧잘 화를 냈다. 그러다 우연히 은퇴자모임에서 소개받은 보수단체 집회에 나가 정부 비판 구호를 실컷 외치고 나니 후련해지는 것 같아 자주 집회에 참석하게 된다.
#30대 워킹맘인 이지혜(가명)씨는 몇년 전 교통사고로 자녀 중 한 명을 잃어 큰 상실감을 겪었다. 세월호 사건 땐 자식 잃은 피해자 가족의 슬픔에 공감해 촛불집회에 나가 함께 위로하니 정의로운 일을 한 것 같아 우울감은 좀 나아졌는데, 이상하게도 감정은 더 예민해져 작은 일에도 쉽게 남들에게 울컥한다.
인간은 위협·슬픔 겪으면 화내도록 진화
신경전달물질 분비, 방어할 힘 유발 원리
아드레날린으로 각성…작은 일에도 격분
누구나 살면서 가슴 아픈 경험을 하기 마련이다. 이것이 오랜 기간 울분으로 맺혔다가 일종의 ‘방아쇠’ 역할을 하는 사회적 분위기나 특정 이벤트와 겹치면 타인에 대한 무차별적 공격성으로 표출되곤 한다. 지난 정부와 현 정부 들어 끊이지 않는 각종 광화문 집회, 온라인 포털에서의 성난 댓글들은 이 같은 흐름을 방증한다.
심리학자들은 분노의 일반적 원인으로 슬픔, 공포·불안·걱정, 부당함·부조리, 박탈감·무력감, 자존감 저하 등 1차적 감정·정서를 꼽는다. 분노는 1차적 감정·정서로 유발된 2차적 감정이라는 것이다. 미국 심리전문가 단체인 헬시사이크(healthypsych)에 따르면 사람들은 공포·슬픔으로 스스로 취약하고 통제력이 없는 것처럼 느끼면 이를 피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에너지가 급증하는 분노 상태로 전환돼 스스로 통제력을 가진 위치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려는 경향이 있다. 세월호 사건의 슬픔, 북한 핵·미사일 도발에 대한 공포감, 경제악화에 따른 걱정, 일부 정치인·공직자들의 자녀교육 특혜 논란에 따른 박탈감, 일본 무역보복 조치로 인한 자존감 저하가 국민적 격분으로 이어졌던 최근 몇 년간의 국내 상황이 이에 오버랩된다.
불안·공포 등의 감정은 왜 분노로 이어질까. 분노는 생존을 위협하는 대상에 대해 방어 준비를 하고 대응공격을 하기 위한 생물학적 진화장치다. 분노 표출의 원초적 양상 중 하나는 공격성이다. 용인정신병원과 한양대 정신건강연구소 연구진은 ‘공격성의 신경생물학’ 보고서에서 “공격성의 신경회로는 진화과정상 거의 변하지 않고 종특이적인 측면이 매우 제한적”이라며 “공격성에 대한 동물 모형의 체계와 기능이 인간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분노하면 이 같은 방어·공격을 위한 생리적 현상이 진행된다. 우선 두뇌에서는 카테콜아민(아드레날린·노르아드레날린·도파민 등)으로 알려진 신경전달 화학물질들이 분비돼 최소한 수분간 싸울 수 있는 에너지의 폭발을 경험하게 한다. 동시에 심장박동이 커지고 혈압이 오르면서 팔·다리에 혈액공급을 늘려 위협 대상을 제압할 준비를 시킨다.
따라서 위협과 불안에 맞서 화를 내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런 만큼 분노를 무조건 죄악시하기보다 어떻게 적절히 조절할지에 관심을 둬야 한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의 대부분은 두뇌 중에서도 편도체라는 부위에서 일어난다. 이 기관은 위협 상황을 맞아 우리 뇌 속에 경고 메시지를 전하는 역할도 한다. 이런 편도체 작용은 매우 빠르고 효율적으로 일어나 이성적 사고를 담당하는 뇌의 다른 부위가 상황을 적절히 판단하기도 전에 분노가 울컥하고 터지게 된다.
분노의 원인이 해소되더라도 완전한 감정해소 과정은 더디게 일어난다. 길게는 몇 시간, 며칠 이상 걸리기도 한다. 진화론적으로 보면 동물은 사라진 위협이 재발하더라도 즉시 다시 공격·방어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아드레날린 분비에 따른 각성상태를 천천히 이완하도록 진화했다. 이로 인해 각성상태가 유지되는 동안은 ‘분노의 문턱’이 낮아져 사소한 일에도 쉽게 감정이 폭발한다. 평소 화를 잘 내는 사람일수록 작은 일에도 울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분노 책임소재 못찾으면 희생양 찾아
특정 인물·조직에 무차별 공격성 표출
적절한 상황에서 개인이나 집단의 분노는 사회적으로 부조리한 문제에 대한 경고를 주고 재발방지를 압박한다는 차원의 순기능도 있다. 반면 표출 양상이 막연한 분풀이를 위한 희생양 찾기 방식으로 진행된다면 역기능이 커지게 된다. 일본 뇌과학자인 나카노 노부코는 저서 ‘감정본색’에서 “사람은 책임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상태를 매우 싫어하며, 이런 상태에 처하면 스트레스를 받도록 돼 있다”며 “심리적 스트레스를 어떻게든 해소하기 위해 특정 인물과 조직에 책임을 돌리고 공격하기 시작한다”고 분석했다. 그는 “간토(관동)대지진 때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집어넣었다’는 헛소문이 퍼져 조선인들이 큰 피해를 당한 것도 전형적인 사례”라고 환기했다. 아울러 “이질적인 개체를 어려운 상황에 몰아넣을 때 사람의 뇌에서는 (쾌락을 느끼게 하는 물질인) 도파민이 방출되므로 집단 모두 기쁨을 공유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마녀사냥식으로 희생양을 찾는 분노의 공격은 도파민 쾌락에 젖은 일종의 마약중독과 유사한 것임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미국중독자센터(American Addiction Centers)에 따르면 판단력을 담당하는 두뇌 부위인 전전두엽피질 중에서도 좌측은 감정의 스위치를 끌 수 있다. 따라서 “분노 조절은 전전두엽이 편도체보다 우위에 서도록 해 화난 감정에 대한 반응을 어떻게 제어할지 조절하도록 돕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라며 긴장완화와 판단력을 활용한 감정통제 연습을 권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