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조선산업의 생존을 위한 구조조정이 노동계의 몽니로 난관에 부딪혔다. 노조와 노동단체가 국내 조선업계의 최대 발주처인 유럽과 경쟁국인 일본의 경쟁당국을 직접 찾아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의 기업결합심사를 저지하겠다고 나서면서다. 파업으로 수주회복에 찬물을 끼얹고 있는 노조가 이제는 경쟁력 확보를 위한 구조조정의 발목까지 잡고 있는 셈이다. ★관련기사 3면
민주노총 금속노조와 대우조선해양 노조가 주축이 된 ‘재벌 특혜 대우조선 매각저지 전국대책위원회’는 26일 청와대 사랑채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다음달 1일 유럽연합(EU) 유럽집행위 경쟁총국(DG Copm)과 면담해 대우조선 매각의 부당성을 알리는 기업결합심사 반대 의견서를 제출하겠다”고 밝혔다. 이들은 또 파리를 방문해 FTM-CGT프랑스 금속연맹 알스톰 지멘스 대응팀과 간담회 등을 통해 연대할 예정이다. 노동계가 EU 경쟁당국을 타깃으로 삼은 것은 한국조선해양의 대우조선 인수에 의한 기업결합심사의 최대 변수가 유럽이기 때문이다. 한국조선해양은 지난 7월 중국 국가시장감독관리총국에 기업결합심사를 신청한 데 이어 9월에는 일본 공정취인위원회에 신고상담 수속을 개시하며 대우조선해양 인수 작업에 속도를 붙이고 있다. 유럽은 4월부터 사전 절차를 진행해왔다.
노조는 한국과 무역분쟁을 겪고 있는 일본 경쟁당국에도 대응팀을 보내 결합심사 허가를 막을 계획이다. 유럽과 일본 등 결합심사 대상국 6곳 중 한 국가라도 결합을 불허하면 대우조선 매각은 무산된다. 이를 두고 조선업계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한 조선업계 관계자는 “6개 심사국 중 공정경쟁의 전통이 강한 유럽, 한국과 마찰을 빚고 있는 일본은 대우조선 매각의 최대 관문으로 꼽힌다”며 “국가적 차원에서 조선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진행 중인 사안인 만큼 노조가 투쟁보다 생산 경쟁력을 높이는 데 역량을 집중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고 말했다.
조선 구조조정 딴지 거는 勞...‘부활날개’ 스스로 꺾나
[경쟁국서 기업결합 반대 외치는 노조]
“勞 밥그릇 챙기려 자국산업 경쟁력 갉아먹는다” 비판
정상화 실패 땐 글로벌 수주 급감 등 또 침체의 늪 우려
“현대중공업그룹과 대우조선해양의 기업결합에 대해 충분한 문제점과 의혹을 제기해야 한다. 유럽 공정위 현지에 ‘금속노조 원정단’을 파견해 의견서를 제출하고 면담을 추진하겠다.”
민주노총 금속노조와 금속노조 대우조선 지부가 중심이 된 ‘대우조선 매각저지 전국대책위원회’가 오는 10월1일 유럽연합(EU) 본부가 있는 벨기에 브뤼셀로 날아가 ‘원정투쟁’을 벌이기로 하면서 노조가 ‘밥그릇’을 위해 자국 산업 경쟁력을 갉아먹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특히 EU뿐 아니라 한국과 역대 최악의 분쟁을 겪고 있는 일본 경쟁당국에도 사람을 보내 두 회사 기업결합의 ‘부당함’을 주장하겠다는 게 금속노조의 계획이다. 그렇지 않아도 일본 조선업계는 “한국 정부가 자국 조선업체에 보조금을 투입하고 있다”며 세계무역기구(WTO) 제소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자국 업체가 ‘독과점’을 벌이고 있다고 해외 경쟁당국에 노조가 알리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이제 겨우 기지개를 켜고 있는 조선업체의 노조가 외국 정부에 “우리 정부의 산업재편 정책을 막아달라”고 주장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우려를 표하고 있다. 국내 조선산업은 지난 2010년대 중반 조 단위 손실을 기록하며 공멸 위기에 몰렸던 경험이 있다. 이번 원정투쟁을 주도하고 있는 노조가 소속된 대우조선에는 지금까지 약 13조7,000억원의 공적자금이 투입됐다.
2017년과 지난해 수주가 반짝 늘어나며 살아나는 듯했던 조선산업은 올 들어 다시 침체의 늪에 빠져 있다. 올해의 4분의3이 지나고 있지만 국내 업체들은 연초 내세웠던 올해 수주목표의 40%도 채우지 못했다. 미중 무역분쟁과 이에 따른 글로벌 경기침체로 수주가 급감했기 때문이다. 삼성중공업이 지난달까지 53.8%의 달성률을 보이며 절반을 겨우 넘었고 대우조선은 35.8%, 현대중공업그룹(현대중공업·현대삼호중공업·현대미포조선)은 31.4%에 그쳤다. 2017년과 지난해 수주해놓은 일감이 소화되면 조선소의 도크가 비는 악몽을 다시 겪을 수 있는 상황이다.
대우조선을 현대중공업그룹에 매각하는 방안은 세금 투입으로 유지되고 있는 한국 조선산업의 ‘빅3’ 체제를 정상화하기 위한 산업재편의 일환으로 추진되고 있다. 글로벌 발주는 한정돼 있는데 현대중공업그룹과 대우조선·삼성중공업 등 3개 업체가 저가수주 경쟁을 벌여 ‘제 살 깎아 먹기’에 몰두하고 있어서다. 산업은행이 대우조선에 공적자금을 투입해 국내 업체들 간 글로벌 과당 경쟁을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연구개발(R&D) 부문 등에서의 중복투자를 막고 ‘규모의 경제’를 통해 가격 경쟁력과 건조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는 것도 두 회사 결합의 장점으로 꼽힌다.
하지만 대우조선 노조는 한국조선해양 자회사로의 편입이 결국 일자리 감축으로 연결될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조선해양과 산업은행이 “2010년대 중반에 이미 충분한 구조조정을 통해 조직 슬림화를 이뤄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인력 감축은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지만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금속노조 원정단은 EU 경쟁당국과의 면담이 이뤄질 경우 두 회사의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부문에서의 높은 점유율과 독일 지멘스와 프랑스 알스톰의 합병 무산 사례를 강조할 것이라고 밝혔다. 현대중공업그룹과 대우조선을 합한 전체 시장점유율은 약 21%지만 국내 업체가 압도적 경쟁력을 가진 LNG선은 이야기가 다르다. 두 회사를 합하면 점유율이 약 60%에 이른다. 전문가들은 최근 결합심사에서 전체 시장점유율이 아닌 LNG선과 같은 특정상품 점유율을 중점적으로 보는 흐름이 강하다고 설명한다.
노조는 최근 EU가 합병을 불허한 지멘스와 알스톰 합병의 사례도 강조하겠다고 했다. 노조 관계자는 “지멘스와 알스톰 노조가 합병심사에 반대해 불허를 이끌어낸 경우”라며 “현지에서 두 회사 노조 관계자들과도 면담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지멘스와 알스톰 철도사업부의 합병심사에서 EU 경쟁당국은 시속 300㎞ 이상 초고속열차 부문과 신호체계 분야에서 독과점이 우려된다며 합병 불가 결정을 내렸다. 두 회사의 철도차량과 신호체계 분야 점유율을 합하면 15.3%가량이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한국 조선산업의 장기 경쟁력 확보를 위한 방안에 노조가 몽니를 부리고 있다”며 “일자리를 위해서라면 해외 투쟁을 멈추고 본질적인 산업 경쟁력 강화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EU와 일본을 비롯한 결합심사 대상 6개국 중 한 곳이라도 결합을 불허하면 대우조선 매각은 무산된다.
한편 대우조선 노조는 올해 임단협에서 매각 철회뿐 아니라 △기본급 5.8% 인상 △성과급 지급 기준 마련 등 제도 개편 △사내 하청노동자 처우 개선 △사내복지기금 출연 △정년 만 60세에서 만 62세로 연장 등을 요구하고 있다. 반면 회사는 기본급 3만2,215원(정기승급분 포함) 인상, 타결격려금 50만원(정액), 경영성과 평가 연계 보상금 등을 제시하며 이견을 보이고 있다. /박한신·서종갑기자 hspark@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