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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 1918년 '토탈 워' 1차 세계대전 종결

파리 퐁피에뉴 솦서 종전 조약

오토 믹스 작(作) ‘전쟁 중 참호에서의 점심식사’. /플리커오토 믹스 작(作) ‘전쟁 중 참호에서의 점심식사’. /플리커



1918년 11월11일 프랑스 파리 동북부에서 70㎞ 떨어진 콩피에뉴 숲. 특별열차 안에서 연합국과 독일이 종전협정을 맺었다. 아침 일찍 문안에 합의한 양측은 발표시간을 오전11시로 잡았다. 11월11일 오전11시. 젓가락으로 국수를 먹거나 막대형 과자를 주고받는 날로 알고 있지만 101년 전 종전기념일이자 전몰용사 추모일이다. 부산에서도 이날 이 시각에 6·25전쟁에서 죽은 유엔군 전몰장병을 기리는 1분간의 묵념행사가 매년 열린다. 국적이 어디든 나라를 위해 죽어간 젊은이들의 명복을 빈다.


개전에서 종전까지 양측은 4년 3개월 2주 동안 싸웠다. 당초 전망은 단기전.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병사들에게 “낙엽이 지기 전에 고향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큰소리쳤다. 끝없이 늘어진 전쟁은 미증유의 참사를 안겼다. 프랑스와 영국을 위시한 연합국과 독일, 오스트리아, 오스만 제국 동맹국이 동원한 병력만 6,800만명. 약 1,770만명이 죽거나 실종되고 2,100만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당했다. 민간인 사망도 770만명에 이른다. 경제적 피해는 2,000억달러 이상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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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국은 서로 죽이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영국은 600만명, 독일 1,300만명, 프랑스는 800만명을 전선으로 보냈다. 독일과 프랑스의 병력 동원 비율은 인구의 20%. 여성과 노인·아동을 빼면 전 국민이 동원됐다는 얘기다. 독일과 프랑스는 병력의 반을 잃었다. 세대가 몽땅 사라질 만큼 참혹한 전쟁은 왜 일어났을까. 사회진화론으로 대표되는 무한 과당경쟁과 세기말부터 형성된 인명 경시 풍조가 전장으로 옮겨진 것뿐이다. 전쟁 원인에 대해서도 피셔 논쟁 등 논란이 분분하지만 확실한 것은 두 가지다. 첫째, 황제나 군인뿐 아니라 각국의 모든 국민들이 전쟁 발발 소식을 열광적으로 반겼다. 둘째,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으로 여겼다.

과연 전쟁은 종식됐을까. 물이 차는 참호에서 온갖 질병에 시달리고 기관총과 항공 폭격, 독가스에 죽어가는 참상을 겪은 인간은 20년이 지나지 않아 또다시 세계전쟁을 치렀다. 1차 세계대전은 경제적 총력전을 감당할 수 있는 정치 시스템이 승리의 요건이라는 교훈도 남겼다. 단 하나의 예외도 있다. 일본. 획일적 전제주의 국가가 패배한 1차 대전에서 유일하게 고속성장의 꿀을 빨았다. 2차 세계대전에서 혼쭐이 났으면서도 전쟁국가로 돌아가려는 일본보다 더 걱정인 게 있다. 무한 경쟁과 인명 경시, 전쟁 불사론을 외치던 1차 대전 직전 사람들과 우리는 얼마나 다른가.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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