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건축과도시] 1층을 비웠더니 골목이 살아났다...힙스터 성지 된 '강남 쌈지길'

■ 신사동 가로골목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가로골목’ 건물 전경. ‘깃발 땅’ 대지 형태에 따라 대로변과 세로수길로 통로를 만들고 주요 시설은 뒤편에 배치했다. /성형주기자


서울 신사동 가로수길 655m를 따라 좌우로 거대한 광고판이 줄지어 서 있다. 자기주장 강한 간판과 휘황찬란한 파사드는 마치 성벽과 같다. 브랜드를 알릴 수 있다면 출혈경쟁도 불사하는 전장이다. 리테일 시장의 최전선에서 건물 경계선 한 톨도 허투루 쓸 수 없다. 이런 곳에서 1층을 비우고 기꺼이 세로수길로 통로가 되어주는 상업시설이 있다. 주인공은 지난 8월 문을 연 ‘가로골목’이다.

이 건물의 대지 모양은 일명 ‘깃발 땅’으로 그리 깔끔하지 않다. 가로수길 대로에는 좁게 접하고 뒤편 세로수길까지 큰 필지가 붙어 있다. 가로골목은 대로변에는 새하얀 ‘포치’로 입구를 만들어 사람들의 발길을 머물게 했고, 비어 있는 1층 광장부터 4층까지 완만한 슬로프로 따라 옥상까지 둘러 오르면서 작은 상점들을 만나도록 했다. 이 건물은 부동산 자산운용사인 ‘이지스자산운용’이 기획했고 ‘베리앤머치’가 리테일 운용계획을 짰다. ‘더시스탬랩 건축사사무소’의 김찬중 소장이 건축 설계를 맡았고 디벨로퍼 ‘네오벨류’도 직접 투자했다.



비어있는 1층 광장에서는 입점 브랜드 사이에 협의를 통해 각종 이벤트가 벌어진다. /사진제공=이지스자산운용


■상권 아닌 상업공간을 위한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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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렴한 월세로 실력있는 점포 입점 유도

쌈지길 노하우 접목한 ‘가로골목길’ 탄생

가로골목은 준비된 실험이자 모험이다. 2016년 이지스자산운용의 기획으로 탄생한 인사동 ‘쌈지길’을 빼놓고 가로골목을 이야기할 수 없다. 그간 쌈지길에서 누적된 운영관리 노하우와 성공을 통해 가로골목은 ‘제2의 쌈지길’이자 ‘제1의 가로골목’으로 탄생했다.

쌈지길은 사실 서울에 얼마 없는 상권 아닌 상업공간이다. 100여개의 가방·액세서리 등 수공예 상점이 밀집한 상업시설이 인사동 상권을 대표한다. 건물을 두른 긴 슬로프 길을 따라 소형 점포가 만난다. 운영방식도 주변보다 저렴한 월세로 실력 있는 임차인을 입점시킨 뒤 매출과 연동해 이윤을 운용사와 나눈다. 이철승 이지스자산운용 개발투자부문 이사는 가로골목의 창의적인 시도는 무모함이 아니라 쌈지길로부터의 정확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자신감이라고 말한다.

그는 “공간의 특색 덕에 대로에서 유동인구 중 30%가 쌈지길 광장으로 들어오고 이 중 70% 이상은 꼭대기까지 올라가 본다는 트래픽 분석 데이터가 나왔다”며 “운용주체가 사람을 끌어들일 요인을 만들어주고 실력 있는 점포의 강점을 살려준다면 함께 더 오래 효율적인 매출을 낼 수 있다는 결과를 확인했다”고 말했다.

가로수길변 1층에 상업시설을 넣지 않고 비워 입구를 만든 후 광장으로 유동 인구가 유입될 수 있도록 했다. /사진제공=이지스자산운용


서측 외부로 열려있는 보행로. /사진제공=이지스자산운용


보행로 끝에 있는 야외 옥상에서 이벤트가 열리고 있다. /사진제공=이지스자산운용


■트인 골목…루프톱으로 가는 길


금싸라기 1층에 상점 대신 통로 만들어

옥상 오르다보면 힙한 상점들 옹기종기

이 같은 쌈지길의 특색을 그대로 강남에 재구성한 것이 가로골목이다. 장소로 기다란 평지보행 상권이 있는 가로수길이 안성맞춤이었다. 김 소장은 이곳에 대로변을 세로수길까지 터 열고 1층을 비워내는 해법을 내놓았다. 금싸라기 가로수길 1층을 빽빽한 광고판들 사이에 틈으로 만든 셈이다. 틈 사이로 지나가던 사람들이 흘러 들어온다.

펌핑그라운드(광장)로 들어선 사람들은 길게 돌아 오르는 동선을 마주한다. 대지면적(727㎡)이 쌈지길의 절반 수준이지만 슬로프가 4개 층을 건물 안팎으로 돌아 오르는 구조다. 12m를 갈 때 1m 오르는 경사로를 따라 스킵플로어로 설계돼 엘리베이터 기준으로는 옥상까지 6개 층이다. 서측 보행로는 길이면서도 가로수길을 내려다볼 수 있는 발코니다. 부담 없이 찬찬히 걸어가다 보면 ‘힙’한 소규모 상점 22개를 만나볼 수 있다. 보행로 중간에 쉬어갈 수 있는 공간과 종착지인 옥상은 인생 샷의 성지다. 요즘 같은 가을과 어울리는 갈대 조경, 불그스름한 조명에 자꾸만 셔터에 손이 간다. 자연스럽게 가로수길에서 가장 오래 머물 수 있는 공간이 되는 것이다.

12m거리 당 1m가 올라가는 완만 경사로가 거리에 있는 상점을 만나는 느낌을 준다. /이재명기자


■지속 가능한 가로수길의 미래

좋은 브랜드 찾기위해 전국 이잡듯 뒤져

1층부터 4층까지 모든 매장 임대료 같아

공간이 매력적이다 보니 콘텐츠도 돋보인다. 가로골목의 프로그램 프로듀싱을 맡은 베리앤머치는 입점 브랜드를 찾기 위해 벼룩시장부터 온라인 편집숍, 백화점까지 국내외 업체를 전수조사하다시피 했다. 이 중 980여개를 추렸다.

콘텐츠만 좋다면 아무리 작은 업체라도 최저 보장 임대료만 내고 매출 연동 조건으로 가로수길에 브랜드를 내걸 수 있다. 최대 한 업체당 13㎡ 면적 규모로 소형 리테일이 자리를 꾸밀 수 있다. 아기자기한 디자이너 옷집과 잡화점들이 모여 시작된 예전의 가로수길처럼 작은 상점을 다시 이곳에 불러들였다. 현재 가로골목의 기본 임대료는 3.3㎡당 50만원으로 인근은 120만원 이상인 것을 감안하면 문턱이 훨씬 낮다. 심지어 1층부터 4층까지 모든 매장의 임대료가 동일하다. 1개월·3개월·6개월·1년 등 단위로 임대계약 기간도 유연하다. 매출의 20%가 월세를 넘기면 그 이상은 운영주체와 공유하는 만큼 프로듀서의 지원도 적극적이다.

한기룡 베리앤머치 대표는 “단순히 매출만이 아니라 얼마나 열심히 오프라인에서 장사를 하고 더 좋은 콘텐츠로 개발할 의지가 있는지 다각도로 들여다보고 있다”면서 “작은 브랜드가 가로수길에서 기회를 살려 나가고 가로골목도 지속 가능하도록 하는 시작 단계”라고 설명했다.
이재명 기자
nowlight@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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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부동산부 이재명 기자 nowlight@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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