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기업

샐러리맨서 재계 2위 총수, 그리고 그룹 해체…비운의 혁신가 김우중

[세계경영 신화 김우중 잠들다]

만30세 500만원 가지고 창업

불모지 해외시장 공략 수출 쾌거

도전·개척정신으로 社勢 급성장

무분별 차입경영에 IMF때 몰락

관료들과 갈등, 개혁대상 되기도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지난 1999년 한국을 찾은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과 자동차 모형 제작 과정을 살펴보고 있다.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지난 1999년 한국을 찾은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과 자동차 모형 제작 과정을 살펴보고 있다.




김 전 회장이 자전거를 타고 퇴근하고 있다김 전 회장이 자전거를 타고 퇴근하고 있다


김 전 회장이 공장을 둘러보며 직원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김 전 회장이 공장을 둘러보며 직원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삶에는 한국 사회의 고도성장 과정이 그대로 응축돼 있다. 김 전 회장은 샐러리맨으로 시작해 너른 인맥과 발 빠른 판단 및 추진력으로 한때 대우그룹을 재계 서열 2위까지 끌어올렸다. 이후 정상을 향해 끝없이 비상할 것처럼 보였지만 급추락하는 ‘이카루스’처럼 한순간에 무너져 대우조선해양 등 일부 기업에서만 흔적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김 전 회장에 대한 업계 평가도 확실히 나뉜다. 글로벌 경영으로 한국 기업의 보폭을 한층 넓힌 선각자적 경영인이라는 평가와 무분별한 차입경영 및 분식회계 등으로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초래한 인사라는 평가가 엇갈린다.


김 전 회장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전쟁 등의 영향으로 고된 학창 시절은 보낸다. 1936년 대구에서 태어난 김 전 회장은 한국전쟁 당시 아버지인 김용하 전 제주도지사가 납북되며 5남매의 장남으로서 집안을 책임진다.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 경제학과에 입학했으며 이후 연세대동문회장을 지낼 정도로 마당발을 자랑했다.

김 전 회장은 대학 졸업 후 친척이 운영하던 섬유수출 업체 한성실업에 근무하며 세일즈맨으로서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다.

업계에서는 김 전 회장의 ‘세계경영’ 성공 신화가 만 30세 때인 지난 1967년부터 싹을 틔웠다고 보고 있다. 당시 청년 김우중은 트리코트 원단 생산 업체인 대도섬유의 도재환씨와 손잡고 대우실업을 창업했다. 대우(大宇)는 대도섬유의 대(大)와 김우중의 우(宇)를 따서 만든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자본금 500만원으로 시작한 대우실업은 첫해부터 싱가포르에 트리코트 원단과 제품을 수출해 58만달러 규모의 수출실적을 올렸으며 인도네시아·미국 등지로 시장을 넓혀 성공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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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에는 영진토건을 인수해 대우개발로 간판을 바꿔 달고 무역 부문인 대우실업과 합쳐 그룹의 모기업 격인 ㈜대우를 출범시켰다. 1976년에는 옥포조선소를 인수해 대우중공업으로 탈바꿈시켰으며, 1974년 인수한 대우전자와 1983년 대한전선 가전사업부를 합쳐 국내 3대 가전사인 대우전자를 만든다. 1978년에는 대우자동차의 전신인 새한자동차를 인수하고 1983년 대우자동차로 상호를 변경했다. 거침없는 확장경영의 결과 창업 15년 만에 대우는 자산 규모 국내 4대 재벌로 성장했다.

김 전 회장은 1980년대 ‘3저 호황’을 타고 해외진출에 성공하며 대우를 세계에 알렸다. 1990년대 동유럽의 몰락을 계기로 폴란드와 헝가리·루마니아·우즈베키스탄 등지에서 자동차 공장 등을 인수하거나 설립하며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본인의 경영철학을 하나둘 현실화시켰다. 당시 김 전 회장은 연간 해외 체류기간이 280일을 넘길 정도로 해외경영에 매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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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997년 11월 닥친 외환위기는 세계경영 신화의 갑작스러운 몰락을 가져왔다. 당시 정부 경제관료들과 갈등과 마찰을 빚으면서 ‘유동성 위기’를 극복하지 못했으며 삼성 등과 시도했던 이른바 ‘빅딜’은 잇따라 좌절됐다. 1998년 3월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맡은 김 전 회장은 ‘수출론’을 부각하며 자금지원을 기대했지만 관료들과의 갈등으로 되레 개혁 대상으로 내몰리기도 했다.

대우그룹은 1999년 말까지 41개 계열사를 4개 업종, 10개 회사로 줄인다는 내용의 구조조정 방안을 내놓았지만 1999년 8월 모든 계열사가 워크아웃 대상이 되며 그룹이 끝내 해체됐다. 김 전 회장은 대우그룹 분식회계를 주도한 혐의로 2006년 징역 8년6월과 벌금 1,000만원, 추징금 17조9,253억원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2008년 1월 특별사면됐다. 2010년 이후에는 후진 양성을 위한 ‘글로벌 청년사업가 양성사업(GYBM)’을 통해 베트남 등 동남아 4개국에서 1,000여명의 청년사업가를 배출하기도 했다.

다만 대우그룹 해체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김 전 회장은 2014년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교수가 집필한 대화록 ‘김우중과의 대화-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를 통해 대우그룹의 해체는 경제관료들의 정치적 판단 오류 때문이라는 ‘기획해체론’을 주장했다. /양철민·고병기기자 chopin@sedaily.com

양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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