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초 지방 출장에서 공기업 입사 6년 차 윤모 대리를 만났다. 신의 직장에 다니고 사원 아파트에서 살기에 아쉬울 게 하나도 없을 것 같은 윤 대리는 대뜸 부동산 문제를 꺼냈다.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는 친구가 너무 부러워요. 무리하다 싶을 정도로 빚을 내 마포에 집을 산 친구가 지금은 10억원대 자산가라네요.” 친구들이 모이면 단연 화두는 부동산이란다. “몇 년 전 정부가 ‘빚내서 집 사라’고 권유했는데 그게 맞았나 봐요”라는 한 마디에 숨이 턱 막혔다.
웃고 넘어갈 말이 아니었다. 지방의 직장인이 느끼는 박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데도 “집값은 안정됐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은 제대로 염장을 질렀다. 지난달 임기 반환점을 앞두고 열린 국민과의 대화에서 한 이 발언은 현장에 있던 워킹맘 이민혜씨에게 곧바로 반격받았다. 이씨는 “서울은 그렇지 않다. 서민은 내 집 한 채 마련하는 게 꿈이자 목표인데 서울에서는 많이 올라 어렵게 됐다”고 꼬집었다.
이씨의 하소연은 14년 전 똑같이 대통령 앞에 섰던 워킹맘 문미옥씨를 떠올리게 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집권 반환점을 앞둔 지난 2005년 8월 국민과의 대화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중산층을 대표해 나왔다는 문씨의 질문 요지는 이렇다. “ 아이 교육 문제로 강남에 전세 산다. 주변에서는 조금 무리하더라도 대출받아 재건축 아파트를 사라고 한다. 하지만 그런 말은 무시했다. 정부 정책 믿고 손 놓고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강남 불패면 나도 불패’라는 대통령의 말을 기억한다. 곧 발표될 부동산정책이 어떻게 성공하리라 확신하는가.”
노 대통령은 거침이 없었다. “강남 재건축 아파트 사서 기분 좋은 사람들이 언제까지 웃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안 사길 잘했지. 이렇게 말할 시간이 온다”고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결과는 어떻게 됐나. 하늘이 두 쪽 나도 부동산을 잡겠다던 노 대통령은 임기 막판 “부동산, 죄송합니다. 너무 미안합니다”며 고개를 숙였다.
어쩌면 이렇게 닮았을까. 참여정부를 계승한 정부라서 그런가. 임기 중 서울 집값이 40% 넘게 올랐다. 그래도 문 대통령은 “부동산은 자신 있다”고 장담했다. 부동산을 잡겠다는 결연한 의지는 좋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시장 실패에 개입하는 것은 정부의 당연한 책무이기는 하나 너무 거칠고 조악하다. 억누른다고 눌러질 시장이었다면 진작에 잡혔을 것이다. 현 정부 들어 18차례 대책이 나왔다.
예나 지금이나 부동산대책의 일관된 흐름은 투기와의 전쟁이라는 낡은 프레임이다. 과거에도 숱하게 가봤던 길이다. 강도를 높일수록 시장의 내성만 키웠고 애먼 실수요자만 피해를 입었다. 수요 억제책을 접으라는 말이 아니다. 집 사면 망한다고 엄포 놓기보다 주택 공급이 충분할 것이라는 신뢰를 심어주는 게 우선이다. 시장의 흐름을 읽고 수요를 충족시키는 일은 시장이 제멋대로 움직이도록 방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규제를 강화하고 대출을 묶는 것은 어쩌면 쉬운 선택일 수 있다. 대출의 고삐를 죄는 것보다 값진 정책은 부동산에 쏠린 뭉칫돈을 생산적 분야로 흘러가도록 설계하는 일이다. 서울 강·남북의 낡은 주택을 새 주택 공급원으로 활용하려는 담대한 도시계획을 마련하는 것은 3기 신도시를 건설하는 것보다 고차원·고품질의 정책이다. 재건축·재개발 손댔다가 뒷감당을 못할 것 같으니 서울 외곽의 농지와 임야를 파헤치겠다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정부의 실력은 여기서 판가름난다.
시장의 목소리를 귓등으로 듣고 창조적이고 담대한 접근과 발상의 전환 없이는 “부동산, 죄송합니다”는 되풀이될 공산이 크다. 14년 전 문씨는 참여정부의 부동산정책을 믿고 강남 재건축 아파트를 사지 않았다고 했다. 비록 미심쩍은 눈초리였지만 말이다. 여태껏 그는 정부 정책을 믿고 있을까. /chans@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