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통일·외교·안보

[오늘의 경제소사] 1522년 취리히 소시지 사건

스위스 내전, 종교개혁 도화선




1522년 3월5일 취리히의 인쇄업자 크리스토퍼 프로샤우어의 집에 12명이 모여 저녁을 먹었다. 프로샤우어는 며칠 뒤 감옥에 갇혔다. 수감 이유는 소시지. 육류 섭취를 금지한 사순절이 시작될 때 소시지를 먹었다는 이유다. 저녁 모임에 참석했던 사람들에게도 비난이 쏟아졌다. 프로샤우어를 지지하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취리히 최초로 구텐베르크 인쇄술을 배워 왕성한 출판 작업을 펼치던 그는 발이 넓었다. 시민들은 신약성서 인쇄 작업에 지친 인쇄공들이 소시지를 먹었다고 여겼다. 실상은 달랐다. 의도한 행위였다.


저녁 모임 자체도 단순히 인쇄공들의 노동 후 회식이 아니었다. 재단사와 방직업자·제화업자 등 다양한 직업군이 모였다. 사제도 두 명 끼었다. 공통점은 교회 개혁. 취리히 교회도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소시지도 포식한 게 아니라 상징적으로 두 개를 조금씩 나눠 먹었을 뿐이다. 개혁 성향이 강한 사람들이 의도한 대로 ‘소시지 사건’은 취리히를 달궜다. 찬반 논란 속에 교회는 소시지 사건을 기회 삼아 불온한 움직임을 차단하려 들었다. 한 달이 채 안 지나 개혁 모임의 반격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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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격의 주인공은 문제의 저녁 모임에 참석했지만 유일하게 소시지를 먹지 않았던 울리히 츠빙글리(당시 38세). ‘성서의 어디에도 사순절 육식을 금지하지 않았다’고 설교해 교회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츠빙글리가 설교 내용을 바탕으로 쓴 ‘음식물의 선택과 자유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소책자는 스위스 종교개혁의 당위성을 부르짖는 최초의 인쇄물이 됐다. 츠빙글리의 설교와 소책자는 빠르게 퍼졌다. 온몸을 던져 흑사병 감염자를 돌봐 신망을 얻고 있었던 덕분이다. 교회가 허례허식에서 벗어나 성서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도 시민과 상공업자들의 호감을 샀다.

츠빙글리의 반격으로 더욱 불거진 취리히 소시지 논란의 승자는 사건을 유발한 개혁파. 이듬해 초 시민 대토론회에서 사실상 승리한 직후 프로샤우어의 저녁 모임 참석자들은 행동에 나섰다. 취리히시의 나무십자가를 끌어내려 조각내며 종교개혁의 깃발을 올린 것. 취리히주는 가톨릭이 우세한 산악주들에게 개종하라며 교역로를 막아 내전으로 번졌다. 오늘날 스위스의 칸톤(州·주)마다 가톨릭과 개신교가 엇갈리는 구도가 당시의 종교 내전으로 굳어진 것이다. 스위스의 부분적 종교개혁은 프랑스 태생 장 칼뱅을 거치며 장로교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한국 개신교의 70%를 차지한다는 장로교의 출발선에는 스위스 종교개혁과 사순절 소시지라는 방아쇠가 있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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