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피가 1,670대까지 추락하는 등 국내 증시가 불안정한 장세를 이어가는 가운데 자사주를 매입하는 기업들이 급증하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실물 경기 침체는 물론 금융위기 가능성까지 제기되면서 주가가 하락하자 상장사들이 직접 ‘우리 주식은 괜찮다’는 신호를 보낸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이 같은 자사주 매입이 실질적인 주가 부양으로 이어지려면 자사주 소각이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17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이날 상장사 38곳이 직접 자사주를 취득하거나 자사주 신탁계약을 체결했다고 공시했다. 약 1주일 전인 지난 10일 자사주 취득 관련 공시를 낸 곳이 4곳에 불과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폭증세다. 통상 자사주 매입은 주주들에게 긍정적인 이슈로 여겨지고는 한다. 기업이 자사주를 직접 산 후 소각하면 1주당 가치가 올라가 주주에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으로 자사주 취득은 자주 쓰이는 주주친화정책이 아니다. 자사주를 사들이는 만큼 현금이 나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경우 기업 입장에서는 그만큼 설비투자나 연구개발(R&D)에 쓸 수 있는 자금을 잃게 된다.
실제로 국내 상장사들이 자사주 취득에 쓰는 돈은 최근 들어 급증했다. 11일 기준 자사주 취득 공시를 낸 기업들이 자사주 매입에 쓰겠다고 밝힌 돈은 총 129억원이었지만 17일에는 이 액수가 266억원으로 늘었다. 같은 기간 자사주 취득 신탁계약을 맺은 기업들의 계약금액 합계는 170억원에서 536억원으로 3배 이상 증가했다.
그럼에도 자사주 매입에 나서는 기업들이 늘어나는 이유는 최근 증시가 급락하는 가운데 ‘우리 기업은 괜찮다’는 시그널을 시장에 주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정도진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는 “경영자가 ‘우리 회사가 현재 자사주를 매입하면 최소한 손해는 안 본다’는 내부 정보를 갖고 있으니 자사주 매입 결정을 내렸을 것”이라며 “이를 감안하면 경기 전반이 안 좋은 상황에서 주가가 하락한 경우 자사주를 매입한다는 것은 ‘우리 회사는 현재 경제상황과 상관없이 좋은 여력을 갖고 있다’고 시장에 신호를 보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날 국내 주식시장에서 코스피지수는 전날보다 42.42포인트(2.47%) 하락한 1,672.44에 거래를 마쳤다. 6일만 해도 2,000선에 달한 지수가 불과 10일 만에 1,600선까지 밀린 것이다. 한국은행과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등 각국 중앙은행들이 금리 ‘빅 컷’을 단행하며 통화정책 공조에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코로나19가 실물·금융위기로 전이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컸던 탓이다. 코스닥지수는 전장보다 2.03% 오른 514.73에 거래를 마쳤지만 장이 시작하자마자 480대까지 폭락하는 등 불안정한 장세를 연출했다. 코스피가 3.19% 하락한 16일에도 22곳의 기업이 자사주 매입·신탁거래 관련 공시를 냈다.
일각에서는 금융위원회가 지난 13일 발표한 증시 안정조치가 자사주 매입 증가로 이어졌다는 해석도 나온다. 당시 금융위는 6개월간 상장사의 자사주 매수 주문 1일 수량 한도를 완화한다고 밝혔다. 원래는 취득 신고한 주식 수를 하루에 10% 나눠 매입해야 했다. 다만 이 같은 자사주 매입이 실제 주가 상승으로 이어지는지는 불투명하다. 실제로 이날 자사주 매입 공시를 낸 기업 중 아톤(7.49%)이나 대림제지(5.66%)처럼 주가가 강세를 보인 곳도 있었지만 지엔씨에너지(-3.96%)처럼 약세 마감한 곳도 다수 있었다. 자사주 취득을 주주가치 제고로 이어가려면 자사주 소각까지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정 교수는 “자사주 매입 공시에 자사주 소각 여부를 명확하게 밝히게끔 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