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을 넘어 ‘창직 하는 사람(Job Creator)’들이 늘고 있다. 끊임없는 세상의 변화와 새로운 것들이 넘쳐나는 시대, 회사에서 찾지 못한 직업 정체성에 대한 숙제를 개인들이 스스로 고민해 찾게 된 것이다. 이들은 스스로의 직업을 새롭게 정의내리기 시작했다.
‘원부연의 직업의 탄생’은 스스로 창직을 한, 나만의 단어를 만들어낸 사람들의 이야기다. 개인과 산업 두 영역에서 새로운 화두를 제시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두 번째 커리어를 꿈꾸는 이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인사이트를 전하고자 한다.
요즘 같은 때 직업에 어울리는 성별을 이야기한다는 건 구시대적인 발상이다. 하지만 불과 50년 전만 하더라도 여자가 할 수 있는 일과 남자가 할 수 있는 일을 분리하곤 했다. 그만큼 인류의 오랜 역사 동안 직업과 성별은 뗄 수 없는 관계였던 것이다.
최근 필자에게 가장 큰 놀람을 줬던 단어는 ‘여자 목수’라는 직업이었다. 부끄럽게도 나 역시 그동안 목수는 남성의 일로만 생각해왔다. 나만의 브랜드로 나무를 깎고 다듬으며 목수 일을 해온, 여자 목수들의 작품을 접하게 되었다. 그 중 김규 작가의 작품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공대를 나와 철학을 전공한 후 프랑스로 디자인 공부를 하러 간 김규 작가는 디자이너를 꿈꾸며 귀국했다. 디자인 회사를 다녔지만 뭔가 좁은 세계에 갇힌 기분이었다. 그러던 그에게 나무라는 소재가 운명처럼 다가왔다. 그렇게 손에 잡히는 나무로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 대학 때 전공은 무엇이었나?
“재료 공학과를 전공한 공대생이었다. 고등학교 때 물리와 화학을 좋아해서 이과를 선택했고, 수능 성적 맞춰 대학에 갔다. 하지만 적성검사를 할 때면 심리학과 등 문과 쪽 성향이 강하게 나왔다. 그런 나에게 공대는 처음부터 맞지 않는 옷이었다.”
- 힘든 대학 생활이었겠다.
“학교를 거의 안 나갔다. 적성에도 안 맞았고 원했던 방향도 아니었으니까. 오랜만에 학교에 나갔는데 중간고사를 보는 날이더라. 마음이 내키면 등교를 하던, 그야말로 제멋대로인 학생이었다. 외부로 겉 돌았고, 철학 아카데미 등 다른 분야를 찾아 다녔다.”
- 철학을 공부하기로 한 계기는?
“예술에 대한 관심이 막연하게 있었는데 미대 등 실 전공을 하기는 두려웠다. 나이도 늦었다 생각했고. 그러다 결국 이론을 공부하기로 했다. 철학과를 들어가 세부 전공으로 예술 철학을 선택했다. 대학 때보다는 열심히 다녔지만 대학원도 성실하게 다닌 편은 아니었다.”
- 대학원 졸업 후 방황의 시간을 겪었다고?
“대학원 졸업 후 2년 정도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 뭘 하고 살아야 할지 매일이 고민이었다. 박사 과정을 할까도 생각했는데 석사 때 지도 교수님이 말리셨다. 박사를 해도 벌이는 늘 고민할 문제며, 공부는 나중에도 할 수 있다고. 중간에는 뜬금없이 김밥 장사를 같이 해보자는 친구도 있었다. 영등포에서 김밥을 떼다 여의도에서 팔아보자는 황당한 제안이었다.”
- 실제로 김밥 장사를 했는지?
“결국 장사의 시도는 접었다. 막상 여의도에 시장조사를 갔는데 이방인 같은 기분이더라. 여의도의 혼잡한 출근길에 덩그러니 서 있는 내 모습이 어색했다. 이후 그 친구는 사탕을 팔자는 둥 엉뚱한 제안을 몇 번 더 했지만 실현된 적은 없었다. 벌써 그게 2005년도 일이다.”
- 결국 다시 새로운 진로에 도전하기로 했다.
“정처 없이 방황 하다 미대 다니는 중학교 친구를 우연히 만났다. 대학 때 화학과를 다니다 다시 미대에 들어갔고, 이후 프랑스로 유학을 간 친구였다. 그 친구와 이야기하다 프랑스로의 유학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 프랑스에서 선택한 전공은?
“처음에는 순수미술 전공으로 미대를 갔다. 사실 디자인 전공을 생각했는데 입시 포트폴리오를 준비하다보니 순수미술 쪽으로 하게 됐다. 그런데 1년 정도 학교를 다니다보니 디자인으로 전공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2학년 때 실내 디자인 전공으로 편입 했다.”
- 실내 디자인으로 편입한 이유는?
“순수미술을 공부하는데 철학과 다녔을 때의 감정들이 떠올랐다. 순수 학문의 공통적 특성일수도 있는, 세상과 동떨어진 듯한 기분. 소통하는 무언가를 추구하고 싶었고 자연스레 디자인 쪽으로 학교를 옮기게 되었다.”
- 프랑스 미대 입시 준비는 어땠나?
“우리나라 미대 입시와는 조금 달랐다. 내가 관심 있는 분야를 중심으로 내 개성이 담긴 포트폴리오를 준비하는 식이었다. 기본적으로 자유로운 편이었던 것 같다. 생각하는 방식도 표현하는 방법도.”
- 실내 디자인 공부는 적성에 잘 맞았는지?
“디자인 전문 학교로 편입 후 공간 디자인, 가구 디자인, 오브제 디자인 등을 배웠다. 언어 때문에도 참 힘들었지만 2학년 유급으로 같은 학년을 1년 더 다니기도 했다. 학년이 마치면 외부에서 인턴을 해야 했는데 그 과정이 무척 재미있었다.”
- 어떤 회사에서 인턴을 했나?
“총 두 번을 했는데, 한 번은 프랑스인이 하는 회사였고 다른 한 번은 한국인이 운영하는 회사였다. 회사다 보니 내가 생각한 것들을 실질적인 결과물로 보여줄 수 있었다. 그 때 실무 경험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빨리 취직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 귀국 하자마자 입사를 했다.
“귀국 직전, 여러 회사에 입사 원서를 냈다. 귀국 다음날 바로 면접을 본 후 업계에서 꽤나 큰 회사에 입사하게 됐다. 그런데 회사 다니는 게 나에게는 참 쉽지 않았다.”
- 어떤 지점이 어려웠는가?
“인턴 때는 작은 회사여서 그럴 수도 있었지만 내 결과물을 바로바로 보여줄 수 있었다. 그런데 한국에서도 큰 회사에 있다 보니 답답한 지점이 많았다. 조직 생활이라는 것도 힘들었고, 보고를 위한 보고서 작업도 너무 많았다. 야근 등 업무 강도도 지나쳤고. 그 전까지는 후회하며 살아본 적이 별로 없었는데, 회사 다닐 때는 하루하루가 후회의 연속이었다.”
- 퇴사를 결심한 시점은?
“그래도 1년 반을 다녔다. 세상의 모든 직장인들이 엄청난 일을 하고 있음을 배웠다. 강도 높게 사회생활을 깨달은 시간이었다.”
- 나무를 접한 계기는?
“회사를 그만둔 이후였다. 회사 다닐 때 샘플로 접하곤 했는데 그 때부터 나무라는 소재를 좋아했다. 자연스레 목공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무엇 때문에 목공에 이끌렸나?
“사실 그 전까지는 디자인이 나의 영역이었다. 실 제작은 별도 업무였고. 그런데 나무라는 소재에 관심이 생기다보니 디자인부터 만드는 것 까지 모두 해보고 싶어졌다. 실업자 대상 정부지원 교육으로 목공 과정이 있었는데, 3개월 정도 배운 후 바로 공방을 차렸다.”
- 빠른 시간 안에 공방을 차리고 목수가 됐다.
“친구랑 함께 차린 공방이었다. 목수라는 직업으로 공방을 운영하는 사업자가 된 것이다. 그런데 한 1년 정도 친구랑 하다 보니 하고 싶은 방향이 달라졌고, 결국 나만의 브랜드를 런칭하게 됐다.”
- 공방 브랜드 ‘밀플라토’, 어떤 뜻인가?
“천 개의 고원이라는 뜻이다. 감명 깊게 읽은 들뢰즈라는 철학자의 책 제목이기도 하다. 공방 운영도 어느덧 8년에 접어들었다.”
- 나무의 매력은 무엇인가? 어떤 나무를 좋아하는지?
“부드러우면서도 견고한 소재, 나무 자체가 가진 생명력이 가장 큰 매력이다. 초반에는 감각적으로 소재를 보다 보니 화려한 결이나 색감에 끌리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점점 나무 자체에 집중하게 되었다. 부드럽고 강하지만 편안한 기분을 주는 오동나무나 담담한 느낌의 은행나무를 선호한다.”
-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이 됐다.
“직접 뭔가를 만드는 사람이 된다는 것. 불과 몇 년 전까지도 상상 못 할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내 손을 보고 목수 손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투박하고 단단한 느낌이라며.”
- 목선반 작업을 한다. 어떤 방식인가?
“목선반은 기계 이름이다. 나무를 깎는 기계라고 이해하면 쉽다. 다만 아래에서부터 만드는 도자기와 달리 목선반 작업은 옆면으로 나무를 깎으며 진행한다.”
- ‘달항아리’, 작품의 주 소재다.
“달항아리는 백자보다 넉넉한 느낌을 주며 달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달항아리는 백자 중에서 큰 항아리를 뜻하는 백자대호를 이르는 말로 2011년 국보 명칭이 <백자대호>에서 <백자 달항아리>로 바뀌었다) 디자인도 좋았지만 달항아리라는 단어의 어감도 참 좋았다. 막연히 달항아리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는데 실제로 이를 표현하는 게 굉장히 어려웠다.”
- 한국적인 소재를 택한 이유는?
“가장 관심이 많은 소재였다. 프랑스로 유학 갔을 때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이 좀 더 깊어진 것도 있고. 외국에 가면 늘 이방인의 입장이 되니까, 더 우리 것을 찾으려는 시간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 때부터 막연한 그림들을 하나 둘 그려갔다.”
- 리서치 과정은 어떻게 했는지?
“국립중앙박물관 등 다양한 박물관을 찾으며 실물들을 찾아보았다. 보면서 만들고 싶은 작품의 크기나 느낌들을 셋팅했다.”
- 첫 작품은 언제 완성되었나?
“2018년이 되어서야 제대로 된 첫 작품이 나왔다. 공방 ‘밀플라토’를 오픈한 후 3년이 지나서였다. 모양을 만들기가 어려워 깎고 깎다 크기가 작아져 포기하기도 하고, 만들다 중단하는 등 많은 시련의 과정이 있었다. 그러다 놀랍게 어느 순간 딱 완성이 되더라.”
- 첫 작품을 판매했을 때 기억이 특별했다고?
“감사하게도 석사 때 조언을 해주셨던 은사님이 첫 작품을 사주셨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공예 쪽을 해보면 어떻겠냐는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다. 굉장히 엉뚱한 조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말씀이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
- 2019년 봄, 첫 전시를 하게 되었다.
“첫 전시는 한옥에서 하고 싶었다. 작품 주제가 달항아리이기도 했으니까. 때마침 서울시에서 한옥 갤러리를 대관해준다는 공모사업을 지원했는데 다행히 합격을 했다. 별도 갤러리 없이 혼자 기획하고 큐레이션 하며 첫 전시를 준비했다.”
- 혼자 준비한 첫 전시, 어땠는지?
“공방에만 있다가 갤러리에 가보니 너무나 다른 기분이었다. 혼자 기획하고 큐레이션 하는 것도 어려움 투성이었고. 도중에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매일같이 들었다. 전날이 돼서야 전시 형태가 겨우 완성되었다.”
- 갤러리 없이 하는 게 힘들지 않았나?
“무엇보다 작품 가격을 이야기하는 게 너무 힘들고 낮 뜨거웠다. 그 때 갤러리의 필요성을 제대로 느꼈다. 올해부터는 갤러리나 샵을 통해 작품 판매를 진행하려고 한다.”
- 작품 가격을 정하는 기준은?
“사실 제일 어려운 게 가격 정하는 것이다. 다른 작가들에게도 물어보고 큐레이터 측 조언도 들었는데, 결국 작가 스스로가 정해야 한다는 게 답이었다. 다행인건 작품이 어느 정도 쌓이다 보니 그 안에서 자연스레 기준이 만들어졌다.”
- 평가에 대한 두려움은 없나?
“당연히 있다. 그런데 어차피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비판의 의견들은 충분히 듣고 참고하면 되는 문제다.”
- 올해 김규 작가의 계획이 있다면?
“‘밀플라토’라는 나만의 작업실이자 공방에서 ‘김규’라는 작가의 작품을 꾸준히 만들고자 한다. 올 가을 전시가 하나 더 잡혀있는데 잘 준비하고 싶다.”
- 작품만으로는 벌이가 어려울텐데?
“그렇다. 목수니까 당연히 다양한 가구를 만들어야 한다. 초반에는 지인들이 많이 팔아줬다. (웃음) 이후에는 수업도 하며 다양한 형태로 활동 영역을 넓혀갔다.”
- 아직까지 여자 목수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다.
“직업에 대한 많은 질문을 받아왔다. 사실 그렇게 많은 질문을 한다는 게 오히려 신기했다. 여자 목수라는 직업이 나에게는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데 보는 사람들에게는 특이한 지점이 있는 것 같다.”
- 실제로 여자여서 힘든 지점이 있다면?
“아무래도 근본적인 근력 차이에서 오는 힘듦이 있다. 나무나 기계를 운반할 때도 그렇고. 그런데 이것도 하다 보니 다 노하우와 요령이 생기더라.”
- 이 직업을 미리 알았다면 커리어가 달라졌을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인생이라는 게 정한 대로 가는 건 아니라고 본다. 그리고 지금까지 해왔던 많은 경험들이 조금씩이나마 도움이 됐다. 심지어 공대를 다녔던 대학생 시절까지도.”
- 여자 목수라는 직업을 정의한다면?
“사실 스스로 어떤 직업이라고 단정해 이야기하진 않는다. 그냥 ‘나무로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 수익은 안정적인가?
“이제는 어느 정도 예산을 짜고 정리하는 나만의 기준들이 생겼다. 초반에는 목공 수업을 많이 진행했는데, 작품에 집중하게 되면서 수업을 줄였다. 수익에 대해서도 늘 불안하지만 어느 순간 그 불안을 뛰어넘는 지점이 생기는 것 같다.”
- 공방이나 작품 홍보, 어떻게 하는지?
“사실 온라인 홍보를 해야 하는데 거의 못하고 있다. 그래도 DM으로 문의가 꽤 오는 편이다. 작품 가격을 물어보기도 하고 사이즈 문의도 많이 한다. 답을 제 때 드리지 못해 늘 죄송하다.”
- 어떤 작가가 되고 싶나?
“작품을 보면 작가와 닮아있는 경우가 많다. 내 작품도 그렇고. 계속 보고 싶은 작품, 계속 만나고 싶은 작가가 되고 싶다.”
- 회사원과 작가의 삶 어떤 차이가 있을까?
“작가는 창조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자 자기가 삶을 시작부터 끝까지 계획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지점에서 작가로서의 지금의 삶에 만족하고 있다.”
- 개척자라는 표현을 종종 듣는다. 어떤가?
“내가 나무 관련 전공을 제대로 한 것도 아니고 목공 수업을 오래 배운 것도 아니다. 사실 마음 가는대로 했던 부분이 크다. 어려운 방법이나 방식들도 편견 없이 해보려고 했고. 그래서 나만의 스타일도 비교적 빠른 시간에 만들 수 있었다.”
- 여자 목수, 추천하는 직업인가?
“괜찮은 직업이라 생각한다. 물론 경제적인 부분은 어렵다. 목수여서 어렵다기 보다 내 사업을 운영하는 측면에서 하는 말이다. 불규칙한 수익을 잘 관리 하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다.”
- 비전공자로 여자 목수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한마디.
“목공을 취미로 하는 분들이라면 내가 만들고 싶은 것만 잘 만들면 된다. 하지만 직업이 되면 고객이 만들어 달라는 걸 만들어줘야 한다. 이 둘은 분명 큰 차이가 있다. 그 지점을 잘 넘길 수 있다면 각자만의 방식이 생기지 않겠는가.”
원부연. 서울경제신문 라이프점프 객원기자. 전 광고 기획자에서 음주문화공간 기획자로 창직 후 술집, 극장, 살롱 등 서로 다른 9개의 공간을 런칭했다. <합니다, 독립술집>, <회사 다닐 때보다 괜찮습니다.>, <퇴사 말고, 사이드잡> 세 권의 책을 쓴 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원부연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