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표지를 바꿔도 내용을 바꾸지 않으면 허사에 불과하다. 다음에 누가 (총리에) 오르든 (국민은) 자민당이 정말 달라졌는지, 아니면 표지만 바꿨는지 묻지 않겠는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에 대한 미숙한 대응으로 아베 신조 총리의 지지율이 곤두박질치고 있는 가운데 그의 라이벌인 이시바 시게루 전 자민당 간사장이 차기 총리 후보로 급부상하며 아베 총리에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지난 4일 마이니치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시바 전 간사장은 아베 총리가 주도하는 자민당의 내부개혁이 시급하다고 작심 발언을 했다. 최근 아베 총리의 최측근인 구로카와 히로무 전 도쿄고검 검사장의 ‘마작 스캔들’과 그에 대한 경징계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했다. 마이니치는 자민당 내에서는 아직 아베 정권의 위기에 대해 침묵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지만 이시바 전 간사장이 아베 총리를 향해 쓴소리를 내뱉으며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시바 전 간사장은 최근 여론조사에서 차기 총리 후보 1위를 독식하고 있다. 산케이신문이 지난달 30~31일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차기 총리에 걸맞은 정치인’에 대한 질문에서 이시바 전 간사장은 18.2%를 얻어 1위에 올랐다. 아베 총리는 12.2%로 2위에 머물렀으며 3위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차남인 고이즈미 신지로 환경상(8.8%)이 차지했다. 고노 다로 방위상(5.0%), 에다노 유키오 입헌민주당 대표(3.5%),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3.0%), 기시다 후미오 자민당 정무조사회장(1.9%)이 뒤를 이었다.
이시바 전 간사장은 올해 들어 니혼게이자이신문·아사히신문 등 다른 매체 여론조사에서도 20% 안팎의 지지를 받았다. 산케이는 “아베 정권의 경제대책에 대한 불만이 이시바 전 간사장에 대한 지지를 밀어올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지난달 실시된 마이니치와 아사히의 여론조사에서는 아베 내각의 지지율이 각각 27%, 29%에 불과했다.
이시바 전 간사장은 돗토리현 출신으로 1986년부터 35년째 중의원을 지내고 있는 거물 정치인이다.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의 권유로 정계에 입문해 1986년 당시 29세의 나이로 전국 최연소 중의원에 당선됐다. 중의원 연속 11선이라는 화려한 타이틀을 갖고 있지만 2012년 9월, 2018년 9월 총재 선거에서 모두 아베 총리에게 패해 고배를 마셨다.
정치 성향은 아베 총리와는 다소 결이 다른 합리적 보수라는 평가를 받는다. 경제발전에 무게를 둔 요시다 시게루 전 총리와 다나카 전 총리의 정치적 노선을 계승하고 있다. 아베 총리가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의 매파 안보 노선을 계승한 것과는 대비된다.
개헌에 대한 구상도 아베 총리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아베 총리가 올해 신년사에서 개헌을 추진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히자 이시바 전 간사장은 쉽지 않을 것이라고 견제했다. 아베 총리가 개헌의 핵심으로 꼽는 것은 전쟁과 전력 보유를 금지한 헌법 9조 개정인데 이시바 전 간사장은 헌법 9조 개정안에 “절대 반대”한다는 입장을 드러냈다.
과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한국이 납득할 때까지 사과해야 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방위상을 지낸 그는 과거 일본의 핵 보유에는 반대한다면서도 핵무기 기술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해 한국으로서는 껄끄러울 수밖에 없다.
이시바 전 간사장이 여론조사대로 차기 총리에 오를지는 미지수다. 의원내각제를 채택한 일본에서 총리 선출권은 국민이 아닌 집권당 의원들에게 주어진 만큼 파벌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중요한데 그의 휘하에 있는 의원은 20명 안팎에 불과하다. 다른 파벌의 지원사격 없이는 총리가 되기 어려운 구도인 셈이다.
아베 총리가 속한 호소다 파벌에 100명에 가까운 의원이 몸담고 있으며 아소 파벌(54명), 다케시타 파벌(53명), 기시다 파벌(46명) 등도 주요 계파를 형성하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자민당 일부 계파에서는 차기 총리 선임작업에 대비해 기시다 정조회장을 밀기 위한 물밑작업을 벌이고 있다고 전했다. 아베 총리의 임기는 내년 9월까지지만 앞날을 장담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