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모자들의 위협으로부터 국왕(고종)을 보호하기 위한 모든 행동을 우리는 승인한다.’
1895년 10월27일 러시아 외무성은 이 같은 내용의 전문을 조선 및 도쿄 주재 러시아공사에게 동시 발송했다. 이는 러시아 정부가 수세에 몰린 고종의 거처를 러시아공사관으로 이어(移御)하도록 승인한 아관파천(俄館播遷) 관련 공식 외교문서다.
일본과 대립각을 세워가며 러시아 정부의 승인을 얻어낸 인물은 초대 주한 러시아공사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1841~1910)였다. 베베르가 러시아로부터 아관파천을 승인받은 시기는 명성황후가 일본에 의해 시해된 을미사변 발생 19일 만이다. 당시 조선에서는 친일내각이 을미개혁 준비에 한창이고, 친러 내각대신들은 각자 외국 공사관으로 피신한 상태였다. 포로 신세나 다름없던 고종이 1년여간 러시아의 보호를 받으며 친일내각 색출과 을미사변 재조사 등을 이끌어내 조선 정국을 을미사변 이전으로 되돌릴 기회를 마련한 것은 베베르라는 인물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최근 동북아역사재단이 번역 출간한 ‘러시아 외교관 베베르와 조선’은 베베르의 첫 외교활동 연구서다. 평전에 가까운 책은 외교관으로서 생의 전성기를 보냈던 베베르의 조선에서의 활동을 다뤘다. 주한 러시아 공사로 12년간 조선에 머물며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등에 깊이 관여한 그의 외교활동이 이처럼 자세히 소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러시아와 조선 최초의 외교관계 수립과 전개과정에 남긴 그의 족적을 따라가는 여정은 한국 근대사와 만나는 길이기도 하다.
역자인 고려대 역사학연구소 김종헌 연구교수는 “이 책을 통해 베베르는 외교관으로서 자국의 이익보다 조선의 자주독립에 대한 개인적 열망이 컸음을 알 수 있다”며 “베베르가 없었다면 친일내각을 몰아내고 고종이 환궁하는 것이 어려웠을 정도로 우리 역사에 중요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김 교수는 “고종이 외국 공사인 그를 특히 신뢰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고종은 그가 본국으로 소환된다는 소문이 돌자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베베르가 조선에 체류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는 공문을 두 차례나 발송해 하기도 했다.
베베르는 결국 일본 정부의 항의와 대한제국의 입장을 대변한다는 자국 정부의 인식으로 1897년 8월 본국으로 소환돼 12년간의 조선 생활을 마무리했다. 본국에서 베베르는 지리학자로서 길을 걷다가 한국어 지명에 대한 러시아 표기법에 대한 책을 내기도 했다. 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 경축행사에 특사 자격으로 서울을 찾은 그에게 고종은 조선에 남을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말년 베베르는 독일 드레스덴 인근에 ‘코레야(Корея)’라는 이름의 별장을 짓고 살다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