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떠나와 열차 타고 훈련소로 가는 길. 부모님께 큰절하고 대문 밖을 나설 때….(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 중)’
경기도 연천은 많은 이들의 뇌리에 ‘군대’라는 이미지로 각인돼 있다. 남성들에게는 고되고도 아련한 군 복무 시절의 추억으로, 여성들에게는 남자친구나 가족을 면회하기 위해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고 힘겹게 찾아가던 여정으로 기억되는 장소다. 4만3,000명 남짓한 인구의 절반 이상을 군인이 차지하는 대표적인 군사도시, 서울에서 차로 불과 1시간여 거리지만 휴전선 접경지라는 특수성 때문에 여행지로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던 곳이 바로 연천이다.
그렇게 ‘군대’로만 기억되던 이곳에 꼭 한번 가봐야 할 일이 생겼다. 연천이 지난해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된 데 이어 올 7월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등재되면서 유네스코 2관왕을 달성한 것이다. 국내 관광지로는 제주·경주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연천은 한반도 형성과정은 물론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지질시대의 암석들을 살펴볼 수 있어 ‘한반도 지질교과서’로도 불린다. 연천군도 이러한 관광자원을 매개로 최근 본격적인 관광상품 개발에 나섰다. 지역 전체를 관광상품화 한 이른바 ‘지질공원(Geo Park)’화 작업이다. 그동안 군사 이미지에 가려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연천의 지질명소를 다녀왔다.
연천의 지질명소는 한탄강과 임진강의 합수지점을 중심으로 좌우로 펼쳐져 있다. 임진강과 한탄강은 신생대 북한 평강지역의 화산분출로 형성된 용암대지의 침식작용으로 주상절리(柱狀節理)와 폭포·협곡 등 다양하고 아름다운 지형과 경관을 품고 있다. 가장 인기 있는 곳은 연천 1경으로 꼽히는 재인폭포다. 연천이 지질명소로 이름을 알리기 전부터 지역 내 거의 유일한 명소로 알려졌다. 폭포를 만들어낸 것은 주상절리인데 폭포가 더 명성을 떨쳐왔으니 고고학의 입장에서는 주객이 전도된 격이다. 어쨌거나 높이 18m에 달하는 절벽에서 쏟아지는 폭포와 그 주변을 감싸고 있는 현무암 주상절리가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
폭포는 최초 한탄강가에 자리하다 침식작용으로 300m 이상 떨어진 현재의 위치까지 밀려난 것으로 추정된다. 폭포 아래에는 다양한 암석들과 하식동굴·용암가스튜브 등이 관찰돼 지질학적으로 가치가 매우 높다. 폭포 아래 차탄천은 천연기념물 어름치와 멸종위기종 분홍장구채 등 다양한 어종의 서식지로도 알려져 있다. 생태 보존을 위해 폭포로의 진입은 전면 금지됐지만, 대신 강화유리로 된 스카이워크가 깔리고 폭포를 정면에서 바라볼 수 있는 80m 길이의 출렁다리 공사도 진행 중이다.
지질여행의 다음 목적지는 백의리층이다. 백의리층은 백의리라는 마을 이름에서 따왔다. 주상절리층과 판상절리층·백의용암층·클링커층·자갈층까지 50만년 전후의 지층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한반도 지형의 속살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고 보면 된다. 한탄강 자갈 바닥을 신생대 제4기 화산활동으로 현무암이 뒤덮었고, 그 위를 다시 암석화되지 않은 퇴적층이 샌드위치처럼 겹겹이 덮고 있다. 깎아지른 듯한 주상절리 절벽과는 달리 울퉁불퉁 입체적인 형상을 하고 있어 유구한 한반도 역사의 흔적이 더욱 실감 나게 다가온다. 다른 지질명소들과 달리 한탄강과 멀리 떨어져 있어 직접 만져볼 수도 있지만 수시로 떨어지는 낙석에는 조심해야 한다.
아우라지 베개용암은 한탄강과 경기도 포천의 영평천이 만나는 아우라지에 자리하고 있다. 베개용암은 뜨거운 용암이 물을 만나 급격히 식으면서 만들어지는 형태로, 둥근 베개 여러 개가 차곡차곡 쌓인 모양을 하고 있다. 그 위로는 연필을 여러 개 직각으로 세워둔 모양의 현무암 주상절리가 자리하고 있다. 물에 닿은 곳들은 베개용암으로, 물에 닿지 않은 용암은 주상절리로 굳어져 각기 다른 모양을 하고 있다. 대개 베개용암은 해저 화산에서 분출된 용암이 차가운 해수를 만나 형성되기 때문에 강가에서 발견된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드물다고 한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경기도 포천지역에 속한 베개용암을 조망하려면 강 건너편 연천으로 넘어와야 한다는 것이다.
베개용암에서 한탄강을 따라 1㎞ 정도를 가다 보면 한탄강변에 우뚝 솟은 좌상바위를 마주하게 된다. 좌상바위는 한탄강 위에 60m 높이로 솟아오른 거대한 현무암 덩어리인데, 화구에서 용암이 분출하면서 그대로 굳은 것이라고 한다. 신생대 4기가 아닌 중생대 백악기에 형성된 현무암으로 앞서 본 현무암들과는 색상부터 다르다. 무엇보다 그 크기에서 압도된다. 이곳 주민들 사이에서 좌상바위는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여겨지지만, 6·25전쟁 때부터 수많은 사람이 떨어져 죽어 ‘자살바위’라는 오명을 쓰기도 했다. 좌상바위 앞은 한탄강이 굽어지는 구간으로 넓은 모래사장에서 바라보는 풍광이 압권이다. 바위 앞으로 잔잔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여유로워지는 느낌이 든다.
이외에도 연천에는 가을이면 절벽에 붙어 자란 돌단풍이 붉게 물들어 적벽이라 불리는 ‘동이리 주상절리’와 ‘차탄천 주상절리’ ‘동막리 응회암’ ‘전곡선사박물관’ ‘전곡리 선사유적지’ 등 임진강과 한탄강을 따라 수㎞에 걸쳐 지질명소가 펼쳐져 있다. 지질명소는 한탄강과 임진강 트레킹코스를 따라 연결돼 있으니, 시간 여유가 있다면 자전거나 도보로 천천히 둘러보길 권한다. 10월 중순부터는 한탄강과 임진강에서 카약을 타고 주상절리 등 지질명소를 감상할 수 있는 ‘지오·카약투어링’, 해설사와 함께 지질명소를 돌아보는 ‘한탄강 지질탐사대’도 운영된다. 수억만년 전부터 이어져온 한반도 역사를 놀면서 배울 수 있는 기회다. /글·사진(연천)=최성욱기자 secret@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