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24일 홍콩의 한 지하철역. 5㎏ 쌀 3봉지를 들고 달리는 한 남성을 보안 요원이 뒤쫓았다. 남성은 인근 슈퍼마켓에서 쌀을 훔친 뒤 달아나는 중이었다. 그는 열차 플랫폼에 뛰어든 후 사라졌다. 그 후 일주일이 지나지 않은 3월 27일 같은 슈퍼마켓 앞에서 두 명의 남성이 체포됐다. 2㎏ 쌀 6봉지를 훔친 혐의였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직후 홍콩에서는 식료품 사재기 등 사회적 혼란이 잇따라 발생하고 있다. 홍콩은 쌀 소비량의 80%를 베트남·태국에서 수입한다. 베트남이 올 3월 쌀 수출을 전면 금지하고 태국 역시 전국 비상사태를 선언하자 불안에 휩싸인 홍콩 시민들이 식료품을 비축하기 위해 몰려든 것. 홍콩 내 주요 마트에서 식료품이 동나고 일부 상점은 쌀 두 봉지와 달걀 두 상자로 구매를 제한하자 도난 사건까지 심심치 않게 벌어졌다.
먹거리 부족에 따른 혼란은 이제 아프리카뿐 아니라 홍콩 같은 선진국에서도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문제로 확산하고 있다. 기후변화와 자연재해에 더해 코로나19 사태는 식품 생산과 유통마저 중단·봉쇄시킬 수 있다는 위기감이 커지는 것이다. 선진국 문턱에 진입했지만 식량자급률이 45.8%(2019년 기준)에 불과한 한국도 남의 일이 아닌 것은 매한가지다.
2020년을 휩쓴 코로나19 사태는 식량 공급망뿐 아니라 생산에도 직접적인 악영향을 미쳤다. 각국이 국경을 봉쇄하면서 농사를 지어야 할 인력 유입이 곳곳에서 막혔기 때문이다. 미국은 멕시코 등에서 농사 인력 25만 명을 들여오지 못해 일손 부족에 시달렸다. 동유럽과 북아프리카에서 농사 인력을 수혈하던 프랑스·독일 등 유럽 선진국도 골머리를 앓았다.
기후변화 역시 식량 생산에 타격을 주고 있다. 인도양의 해수면 온도 변화로 올해 중동 및 아프리카 동부에는 폭우와 홍수 등 기상이변이 속출했다. 동아프리카 내 농경지가 수몰됐고 운송 수단은 파괴됐다. 이후에는 사막 메뚜기떼 4,000억 마리가 나타나 매일 3만 5,000명분의 식량을 먹어치웠다. 메뚜기떼가 바람을 타고 하루 150㎞씩 이동하면서 파키스탄 정부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중국이 파키스탄에 퇴치팀을 파견하기도 했다.
코로나19로 인한 공급망 교란, 각국의 수출제한과 기후변화 등으로 식량 가격 또한 출렁이고 있다. 특히 세계인의 주식이 되는 곡물 가격이 급등했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지난해 96.4였던 곡물 가격 지수는 올 1월 100.5로 껑충 뛰었다(2014~2016년 평균치 100). 이후 진정되던 곡물 가격은 5월부터 다시 5개월 연속 올랐고 10월에는 111.6으로 폭등했다.
한국 정부도 식량 안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 속에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 기준 자급률이 0.7%에 불과한 밀의 국제가격 인상에 농림축산식품부는 촉각을 곤두세웠다. 밀 가격이 장기간 오르면 제분 업체와 식품 업체가 라면·빵·과자 등 제품 가격을 올려야 하는 압박이 거세질 수밖에 없다. 국내 1인당 연간 밀 소비량은 2008년 30.9㎏에서 2013년 31.3㎏, 2017년 32.4㎏으로 지속 증가하는 추세다.
대두와 옥수수 등 사료로 쓰이는 곡물 가격이 오르면 돼지고기 등 육류 가격도 불안해질 수 있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콩 자급률은 26.7%, 옥수수 자급률은 3.5%에 그쳤다. 문재인 대통령도 이 같은 식량자급률 하락을 염두에 둔 듯 지난달 11일 ‘농업인의 날’에 “식량 안보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며 “2030년까지 밀 자급률을 10%로, 콩 자급률을 45%로 높일 것”이라고 다짐했다.
정부가 지난달 ‘1차 밀 산업 육성 기본계획’을 발표한 것도 0%대인 밀 자급률을 높이는 것이 시급해진 국제 식량 상황이 반영됐다. 하지만 정부가 국산 밀 대책을 내놓은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농식품부는 지난해에도 ‘밀 산업 육성법’을 제정하고 밀 비축 제도를 시행했지만 밀 자급률은 2018년 1.2%에서 지난해 0.7%로 오히려 하락했다. 수입 밀에 대한 높은 의존도가 그만큼 구조적인 문제라는 의미다.
기후변화 등 자연재해에 따른 식량 생산량 감소는 국내에서도 진행형이다. 최근 쌀값이 급등하며 ‘단군 이래 최고가’라는 말까지 등장한 것도 생산량 급감이 똬리를 틀고 있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에 따르면 지난달 20㎏ 쌀 평균 도매가격은 5만 3,688원으로 지난해 같은 달보다 18.6%, 평년(4만 20원)보다는 무려 34.1% 급등했다.
이는 올해 쌀 생산량이 52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한 것과 관련이 깊다. 쌀 재배 면적은 0.5% 감소하는 데 그쳤으나 최장 기간 이어진 장마·태풍의 영향으로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5.9% 줄었다. 박수진 농식품부 식량정책관은 “올해는 기상 요인이 생산에 많은 영향을 미쳐 재해 대응이 중요하게 떠올랐다”며 “내년부터는 쌀 수급 계획에 있어 재해 대비 안정적 생산 측면을 좀 더 집중해서 볼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중국 등 농업 대국에 비해 턱없이 좁은 농지를 보유한 한국이 식량 안보를 강화해나가려면 스마트팜 등 신기술을 적극 활용해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식량 소비량의 90%를 수입하는 싱가포르는 도시 농업·대체육·식물성 단백질 생산 등 식품 연구 프로그램에 1억 달러 이상을 지원하고 팜테크·식품 분야 스타트업에 보조금을 쏟고 있다. 식량자급률이 10%대에 불과한 ‘열사의 땅’ 중동에서도 컨테이너 안에서 초록 농장을 가꿔 각종 잎채소를 재배하는 농업 혁신이 가속화하고 있다.
농식품부는 내년 예산 중 스마트팜 실증 고도화 연구에 178억 원을 신규 편성했지만 지난해 세계적으로 농업기술 분야에 투자된 자금(198억 달러·22조 원)에 비하면 미미해 대대적인 재원 확대를 고려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식량 위기가 심화할수록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