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IT

치솟는 연봉 인상 도미노…눈치게임 속 침묵하는 판교의 속사정


넥슨·크래프톤·직방 등 대형 정보통신기술(ICT) 업체가 공격적으로 연봉을 인상하면서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은 중견·중소·스타트업들은 고사 위기에 몰리고 있다. ICT 채용 시장에 고연봉을 앞세운 ‘개발 인력 블랙홀’이 형성되면서 규모가 작거나 재정 여력이 부족한 기업들은 새로운 인재에 대한 투자는커녕 기존 인력 지키기마저 벅차다. 대형 ICT 기업의 인재 쏠림 현상이 심화하면 ‘제2의 넥슨’ 같은 스타 기업 탄생이 구조적으로 어려워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지난해 11월 왼편에는 NHN, 오른편에는 넥슨 사옥이 보이는 경기 성남 판교테크노밸리의 거리에서 점심을 맞아 밖으로 나온 직장인들이 산책을 하고 있다. /성남=권욱기자지난해 11월 왼편에는 NHN, 오른편에는 넥슨 사옥이 보이는 경기 성남 판교테크노밸리의 거리에서 점심을 맞아 밖으로 나온 직장인들이 산책을 하고 있다. /성남=권욱기자





1일 업계에 따르면 중견 게임사 펄어비스(263750)는 지난해 직원 수가 1,208명으로 지난 2018년 대비 26% 늘었지만 인건비는 581억 원에서 1,162억 원으로 두 배가량 급증했다. 전체 매출에서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중도 2018년 14%에서 2년 만에 26%로 껑충 뛰었다. 최근 전 직원 연봉을 800만 원 인상한 중견 게임사 컴투스(078340)는 2017년 1,946억 원이었던 영업이익이 지난해 1,129억 원으로 41.9% 감소하는 와중에 인건비는 483억 원에서 804억 원으로 1.66배 뛰었다. 수익성은 악화하는데 인건비 지출은 늘어난 것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대형 ICT 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체력이 약한 중견·중소·스타트업은 인재 유출을 막기 위한 연봉 인상이 실적에 큰 타격으로 돌아올 수 있어 걱정”이라고 말했다.

◇ 희비 갈리는 판교… 중소·스타트업 인재 유지도 벅차

최근 ICT 업계의 릴레이 연봉 인상 소식에 판교테크노밸리는 희비가 엇갈렸다. 대형 ICT 기업들이 임직원 연봉을 800만 원에서 최대 2,000만 원 수준까지 인상하겠다고 밝히면서 하룻밤 사이에 기업들의 연봉 순위가 바뀌어버렸다. 중견·중소·스타트업은 생존을 걱정할 만큼 분위기가 심각하다.

스타트업·중소·중견 ICT 업계가 당장 걱정하는 사태는 필수 인력 이탈이다. ICT 업계에서는 대학 졸업 이후 대형 스타트업이나 소규모 IT기업에서 시작해 중견 기업을 거쳐 게임사나 네이버·카카오 등 대형 ICT 관련 회사로 점차 몸값을 높여 이직하는 경우가 많다. 대형 ICT 기업에 입사한 후에는 삼성전자나 외국계 기업으로 다시 한번 이직하는 것이 공식처럼 여겨지고 있다. 여기에 대형 ICT 기업들이 파격적으로 연봉을 높임에 따라 기업 간 격차가 더 벌어진 만큼 ‘연봉 뜀뛰기’를 하는 주기도 짧아질 것을 우려하고 있는 모습이다.




실제 최근 연봉을 인상한 일부 기업은 다른 회사의 경력자들에게 적극적인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더 높은 연봉은 물론 스톡옵션 등 추가 인센티브까지 내세워 경력 개발 인력을 끌어 모으고 있다. 중소 ICT기업 관계자는 “아무리 사내 문화를 개선하고 평등한 의사 결정 시스템을 갖춰도 높은 연봉을 당해내기 어렵다”며 “중소·중견 ICT 기업에서 열심히 일하는 인력들도 상대적 박탈감과 패배 의식에 젖어 있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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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견·중소·스타트업들은 인재 유치는 커녕 인재 유지를 위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연봉 인상을 검토하고 있다. 잇달아 연봉을 인상했거나 인상할 예정인 ‘3N(엔씨소프트·넥슨·넷마블)’은 최근 3년 간 실적이 꾸준히 상승해 매출 대비 인건비 비중을 매년 비슷한 수준으로 유지하거나 오히려 줄여나가고 있지만 중견·중소·스타트업은 상황이 다르다. 게임 업계 한 관계자는 “게임사는 주요 게임 출시 일정에 따라 실적이 크게 오르고 추가 ‘파이프라인’이 없는 상황에서는 다음 신작 출시까지 실적이 악화되는 게 일반적”이라며 “한 번 연봉을 올렸다가 이후 매출 동력이 없어지는 경우 최악의 상황이 될 수 있어 고민이 크다”고 전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을 계기로 급성장하고 있는 국내 ICT 산업이 ‘몸값 인플레’ 탓에 꾸준한 성장 엔진 발굴에 실패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인재 경쟁력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화해 새로운 스타 기업이 꾸준히 탄생하는 생태계가 조성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위정현 중앙대 교수 겸 한국게임학회장은 “중소기업에서 대기업으로 이동하려는 움직임이 빨라지면서 이어 중견 회사들도 인재를 뻬앗기지 않기 위해 연봉을 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연봉 인상 트렌드는 중견·중소·스타트업들에 지적재산권(IP) 투자, 주 52시간 근로제, 마케팅 비용 증가와 맞물려 새로운 도전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 입시 지형도도 컴공 선호… 대학이 ICT 인력 공급 늘려야

취준생들의 ICT 기업 선호 현상은 대학 입시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투스의 2021학년도 대입 정시 배치표 최상위에는 서울대 컴퓨터공학부와 전기정보공학부가 자리 잡았다. 지난 2015년 화학생물공학부·기계항공공학부 등이 차지하던 자리를 컴퓨터공학과 전기정보공학이 차지한 것이다. 현재 서울대 컴퓨터공학부 입시 점수는 지방 국립대 의대보다도 높다.

지난달 22일 졸업식이 열린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에 붙은 취업 축하 플래카드.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대기업이 주류였던 과거와 달리 카카오와 네이버 취업을 축하하는 모습이 더 흔했다. /정혜진 기자지난달 22일 졸업식이 열린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에 붙은 취업 축하 플래카드.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대기업이 주류였던 과거와 달리 카카오와 네이버 취업을 축하하는 모습이 더 흔했다. /정혜진 기자


전통적으로 인기가 높았던 제조·금융·유통업도 우수 인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제조업은 공장 등 제조 시설과 연구개발(R&D)을 위한 비용 지출이 커 이렇다 할 설비 투자가 필요 없는 ICT 기업보다 인건비를 확대하기가 쉽지 않다.

새로운 것을 선호하는 ‘MZ세대’의 특성 또한 전통적인 산업군의 인력 확보를 힘들게 하는 요인이다. 2010년대 초 현대차에 입사했지만 현재는 한 스타트업을 운영하는 최모(35) 씨는 “취업 당시 2000년대 이후 현대차에 입사한 일이 과에서 처음이라 교수님까지 축하해주셨다”면서 “하지만 요즘 학교를 졸업한 후배들은 현대차 입사보다 네이버나 카카오 같은 ICT 기업과 고연봉을 보장하는 스타트업에 더 큰 관심을 보인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ICT 업계의 급속한 연봉 상승이 전체 산업군의 인력 불균형을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이경묵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ICT 기업에 우수 인재가 몰리며 산업 간 ‘인재의 부익부 빈익빈’이 커질 수 있다”며 “ICT 인력 수요에 맞게 대학의 전공별 인원도 유연하게 늘려 공급을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미국 스탠퍼드대는 컴퓨터공학과가 학부생 절반에 달하지만 서울대는 50명 수준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정혜진 기자 madein@sedaily.com, 윤민혁 기자 beherenow@sedaily.com


정혜진 기자 madein@sedaily.com·윤민혁 기자 behereno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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