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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빛나는 순간' 고두심 "내가 하는게 마땅하다 생각했어요"

고두심 / 사진=명필름 제공고두심 / 사진=명필름 제공




자신의 작품을 소개하며 “내가 적역”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배우가 몇이나 될까. 고두심은 영화 ‘빛나는 순간’을 선보이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누구보다도 잘 할 수 있었다”고. 그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던 것에는 모두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고두심은 오는 30일 개봉하는 ‘빛나는 순간’ 개봉을 앞두고 21일 인터뷰를 진행했다. ‘빛나는 순간’은 제주 해녀 진옥(고두심)과 그를 주인공으로 다큐멘터리를 찍는 PD 경훈(지현우)이 특별한 사랑을 하게 되는 이야기. 평생 물질만 하며 살아온 베테랑 해녀 진옥을 중심으로 서사가 이어진다. 소준문 감독은 처음부터 제주 출신인 고두심을 진옥 역에 염두에 뒀고, 고두심은 그런 소 감독의 진심을 보고 작품에 뛰어들었다.

“감독님이 처음에 저를 꼬실 때 ‘제주도 하면 고두심이고, 고두심의 얼굴이 제주도 풍광이다’라고 말씀해 주시고 손 편지도 써주셨어요. 저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죠. 게다가 제주도 해녀들은 제주의 정신이자 혼이잖아요. 그래서 제가 꼭 해야 할 것 같았어요. 남녀 멜로물이 조금 가미된 것은 보너스 같은 거라고 생각했고요. 전 제주 4·3사건의 아프고 깊은 상처를 끄집어 내는 장면에서 감동받고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누구보다도 자신 있게 할 수 있다’는 자부심이 있었어요.”

“저는 직접 그 일(제주 4·3사건)을 겪고 전철을 밟아온 것처럼 듣고 살아왔거든요. 그래서 그 장면은 한 번에 거미줄이 술술 나오 듯이, 신들린 사람같이 그 신을 표현했어요. 지금도 감독님은 ‘고두심이 하는 게 맞았다’고 생각할 거고, 저 역시도 제가 하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해요. 어느 배우보다도 부분적인 요소를 몸에 담고 있는 게 많기 때문이죠. 남녀 멜로물에만 비중을 두지 말고 배경이나 배역의 인물의 생각과 삶을 봐줬으면 해요.”

고두심에게 ‘빛나는 순간’은 치유되는 시간이었다. 두 달 동안 제주도 올 로케이션으로 촬영을 하는 것은 행복이고 힐링이었다. 제주도 대표 배우로서 제주도민들의 환대를 받았고, 유창한 제주 사투리로 해녀 삼춘(제주어로 성별 상관없이 이웃사촌보다 더 가까운 관계를 부르는 호칭)들과의 교류도 활발했다.

“19살에 제주도를 떠나 서울에서 지내고 있어요. 그래서 이번에 촬영하는 두 달 동안 좋아했던 고향 음식도 먹고, 고향 명소들도 공유할 수 있어서 좋았죠. 저를 모르는 분들이 없어서 아무 집이나 들어가도 재워주고 밥도 줄 것 같은 분위기라 정말 좋았습니다.”

고두심 / 사진=명필름 제공고두심 / 사진=명필름 제공


70대 노년 여성과 30대 남성의 사랑이라는 파격 설정은 관객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다. 고두심 역시 너무 큰 나이 차이 때문에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세상에 많은 일들 중에 어쩌다가 한 번쯤 있을 수도 있는 일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작품을 두고 남녀간의 사랑에 초점을 맞추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진옥은 해녀로서 50년 동안 평생 물질만 하며 살아오고, 딸도 같은 일을 시킬 수밖에 없는 구조였어요. 그렇게 딸을 바다로 데리고 나갔다가 잃게 됐죠. 진옥이 가까이에서 맴도는 경훈을 바라보다 보니 그 사람도 굉장히 큰 아픔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래서 ‘그 아픔에 내가 손을 내밀면 그 사람이 치유되지 않을까’라는 형태의 사랑을 하게 되죠. 남녀 간의 사랑이라고만 치부하면 말이 안 돼요.”



그는 상대역인 경훈을 연기할 젊은 남자 배우의 캐스팅을 기다리며 “어떤 사람이 걸릴까?”라고 궁금해했다. 나이차를 뛰어넘는 호흡을 맞출 수 있는 배우를 원했는데, 캐스팅이 된 지현우를 처음 마주하고 의아했다. 여리여리한 비주얼의 외모가 먼저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촬영을 시작하면서부터 선입견은 바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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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현우는 외유내강 스타일이에요. 굉장히 강인한 남성의 힘을 보여주더라고요. 그래서 자꾸 이 사람에게 끌렸던 것 같아요. 바람직하고 듬직한 모습이 보였어요. 혼자서도 잘 놀고, 촬영에 임하는 태도도 좋더라고요. 새벽에 나와서 해녀 삼춘들이 물질하러 들어갈 때 인사도 하고, 함께 교감하면서 거리를 좁히는 모습을 보고 ‘후배라도 배울 점이 많다. 대단하다. 가능성이 보인다’고 생각했어요.”

고두심은 ‘빛나는 순간’에서 동시에 상반된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억척스럽고 생존력 강한 해녀의 모습과 경훈 앞에서는 소녀 감성이 되는 모습이다. 고두심이 바라본 진옥은 척박한 곳에서 밑바닥 인생을 살아왔지만, 여자의 끈을 안 놓은 해녀. 언제나 강인해 보이는 진옥에게도 여리여리한 모습이 있다는 것을 100% 이해할 수 있었다.

“나이 70이지만 여자라는 걸 못 놓겠어요. 놓아서도 안 되고요. 어떤 직업을 갖는 것과는 상관없이 여자는 그 끈을 놓지 않아요. 그래서 그런 행운이 얻어지기도 했고요. 해녀를 돌 같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연약한 여자거든요. 그러니까 여자처럼 표현하는 게 당연했어요.”

고두심 / 사진=명필름 제공고두심 / 사진=명필름 제공


영화 속 고두심은 진옥 그 자체다. 그는 검게 그을리고 퉁퉁 부은 얼굴, 자연스럽게 제주 방언을 하거나 해녀들과 함께 노동요를 부르는 것 등으로 해녀의 삶을 자연스럽게 표현했다. 심지어 어릴 적 바다에서 큰 사고가 나서 물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음에도 직접 고무옷을 입고 수영을 했다.

“바다에서 촬영하는 게 어려웠어요. 중학교 때 바다에서 죽을 뻔한 이후로 바다에 갈 일이 있어도 수영은 안 했거든요. 그런데 이번에는 대역을 활용하기에 어려운 역할이더라고요. 어떻게든 제가 해내야 하는 것이었어요. 코로나19로 인해서 수심이 깊은 수영장이 몇 군데밖에 개장한 곳이 없어서 멀리 가서 연습을 하느라 힘이 들었지만 많이 연습했어요. 또 상군 해녀들이 있는데 제가 쓸려 가면 가만히 있겠어요? 그런 안도감이 큰 힘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감독님이 ‘됐어요. 나오세요’ 하는데도 ‘한 번 더 찍을게요. 더 잘 할 자신이 생겼어요’라고도 했어요.”(웃음)

이처럼 베테랑 배우에게도 새로운 인물을 연기할 때마다 고충이 뒤따른다. 습득한 것만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연기는 매 순간 힘든 과정이다. 이 때문에 고두심은 ‘어떤 역할을 하고 싶다’는 생각보다도, 어떤 배역이 주어지면 ‘그 인물에 어떻게 다가가고, 어떻게 고두심이라는 사람을 다 빼고 그 인물처럼 보여질까’라고 고민한다.

“배우들은 경험이 필요해요. 실제로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은 책이나 귀동냥으로 알거나, 많은 사람들의 움직임을 보고 연기에 녹여야 해요. 그런 것을 알려면 새벽시장에 가서 사람들을 보는 것이 좋아요. 사람들이 많이 운집한 곳에서 움직이는 모습을 많이 보고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떡 파는 사람 역할을 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하면서 괜히 떡 파는 사람을 보곤 했었죠.”

이런 마음가짐으로 배역에 완벽하게 스며든 고두심은 ’빛나는 순간‘으로 데뷔 49년 만에 처음으로 해외 영화제에서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제18회 아시안 필름 페스티벌에서 여우주연상의 주인공이 된 것. 노년의 여배우가 배역의 한계를 깨고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열어준 계기로 꼽힌다.

“여배우들도, 일반적인 여자들도 나이는 숫자에 불과해요. 여배우들은 언제든지 그런 배역이 오기만을 학수고대하고요. ‘내가 정말 표현을 잘 할 수 있다’는 에너지를 갖고 있으면서, 그런 기대와 희망을 모두 가지고 있어요. 항상 예쁘고, 흔치 않지만, 특별한 영화를 맞기를 바라고 있어요.”

고두심 / 사진=명필름 제공고두심 / 사진=명필름 제공


추승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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