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

“재정중독 방치법 전락”…‘묻지마’ 돈 풀기에 되레 면죄부 부여 [관점]

◆나라살림 좀 먹는 국가재정법

나랏빚 1,000조 육박해도 초과세수의 빚상환 의무없어

‘노력해야 한다’ ‘할 수 있다’ 권고뿐…재정규율 사문화

고무줄 추경·예타 무력화…지출통제 방화벽 무너져

현행법 한계…재정준칙 담은 ‘건전재정법’ 별도 제정을

정부 경제팀이 지난달 29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올해 2차 추가경정예산안을 사전 브리핑하는 모습. 이로써 문재인 정부의 추경 편성 횟수는 아홉 차례로 늘어났다. /서울경제DB


‘투명한 재정 운용과 건전 재정의 기틀을 확립하고 재정 운용의 공공성을 증진한다.’ 나라 살림살이를 관장하는 국가재정법 제1조에 담긴 법령 제정의 목적이다. 국가재정법은 노무현 정부 시절 재정 개혁을 뒷받침하기 위해 예산회계법과 기금관리기본법을 통합한 것으로 지난 2006년 국회를 통과해 이듬해부터 시행됐다. 법 제정 취지는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늘어난 국가 채무를 관리하고 재정 운용의 효율성과 투명성을 높이자는 데 있다. 쓰고 남은 세수인 세계잉여금의 나랏빚 상환과 추가경정예산 남발 제한 등 재정 건전성 확보 조항을 대거 신설했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진일보한 조치였다. 여야의 초당적 합의로 만들어졌다는 의미도 컸다. 법안은 2년 동안 국회에서 진통을 겪다가 2006년 9월 정기국회에서 찬성률 99%의 압도적 지지로 통과했다.

국가재정법 시행 15년이 흐르면서 건전 재정을 담보할 방화벽이 사실상 허물어졌다. 재정 건전성 조항은 당시로서는 의미가 있었지만 대부분 ‘노력해야 한다’ ‘할 수 있다’ 등의 권고 조항에 불과해 재정 규율이 점차 무력화됐기 때문이다. 재정의 정치화와 적자 편향성을 막기 위한 가이드라인이 흐트러짐에 따라 국가재정법은 재정 중독 방치법으로 전락했다. 되레 ‘묻지 마’ 돈 풀기에 면죄부를 부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결과 2004년 입법 추진 당시 204조 원이었던 국가 채무(D1·중앙정부+지방정부 채무)는 올해 964조 원(2차 추경안 포함)으로, 같은 기간 국민총생산(GDP) 대비 국가 채무 비율은 22.4%에서 47.2%로 치솟았다. 정부가 지난해 말 발표한 중기 재정 전망만 보더라도 오는 2024년 국가 채무 비율은 58.6%로 유럽연합(EU) 재정준칙인 60%에 바짝 다가서게 된다.

나라 곳간 사정이 이런데도 정부는 1일 국무회의를 열고 33조 원 규모의 슈퍼 추경예산안을 의결했다. 3월 15조 원 규모의 추경에 이은 올해 두 번째 추경이고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아홉 번째 추경이다. 선심성 추경 남발도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니지만 더 걷히는 세금 32조 원을 싹싹 긁어 추경에 죄다 털어넣겠다는 것이 온당한 판단일까.

국가재정법상 초과 세수는 그 활용처가 정해져 있기는 하다. 하지만 ‘국가 채무를 우선 상환할 수 있다(90조 1항)’는 권고 규정에 불과하다. 문제는 이 돈이 이듬해에 결산을 마치면 세계잉여금으로 전환돼 국가 채무 상환 등에 사용돼야 한다는 점이다. 만약 추경을 편성하지 않아 초과 세수 32조 원이 그대로 남는다면 어떻게 될까. 내년 4월 국가 결산 후 세계잉여금으로 회계 처리되면 △지방교부금 정산(국세 총액 대비 약 20%)에 12조 6,000억 원을 쓴 뒤 △나머지 19조 4,000억 원 가운데 30%인 5조 8,000억 원을 공적 자금 상환에 사용하고 △남은 재원의 30%인 4조 원을 국가 채무 상환에 써야 한다. 추가 세수를 재원으로 나랏빚 9조 8,000억 원을 갚을 수 있다는 의미다.

정부는 지난해 1차 추경을 통해 전 국민에게 재난지원금을 지원했다. 오프라인 신청 접수 첫날인 5월 18일 서울 종로구 청운효자동주민센터에서 시민들이 지원금 신청 접수를 기다리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는 마지못해 국가 채무 상환에 2조 원을 투입하겠다고 생색내지만 실제 추가 세수 중 나랏빚 상환에 배정되는 돈은 겨우 3,000억 원에 불과하다. 국가 채무 상환에 쓸 2조 원 가운데 1조 7,000억 원은 지난해 쓰고 남은 세수, 다시 말해 2020년도 세계잉여금으로 이미 연초에 용처가 정해진 상태다. 결국 올해 초과 세수 가운데 나랏빚 상환에는 고작 1%만 쓰는 셈이다. 여염집 살림살이도 이렇게 하지 않을 텐데, 국가 재정 운용에서 상식 밖의 일이 벌어지는 것은 국가재정법의 허점이 어디에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박형수 전 한국조세재정연구원장은 “초과 세수를 100% 추경 재원으로 사용하더라도 현행법 위반이 아닌 것은 맞다”면서도 “초과 세수와 세계잉여금 처리 방식을 담은 국가재정법 90조가 재정 건전성 조항이라는 취지를 고려하면 초과 세수를 세계잉여금 처리에 준해서 관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그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나랏빚을 갚을 유일한 재원이 세계잉여금인데 이마저도 앞당겨 추경으로 써버리는 것이 온당한지 의문”이라며 “현 정부 들어 재정 규율이 완전히 무너졌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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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핵심은 정부가 나랏돈을 쓰는 데 광범위한 재량권을 부여한 데 비해 규율은 너무 느슨하다는 것이다. 추경 편성 요건은 나라 살림을 축내는 대표적인 독소 조항으로 꼽힌다. 현행 요건은 전쟁과 재난, 남북 관계 변화, 경기 침체나 대량 실업과 같은 대내외 여건 변화 등으로 폭넓게 규정하고 있다. 이 가운데 경기 침체의 경우 명확한 법적 정의가 없다 보니 추경 남발을 부추긴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경제학계에서는 경기 침체를 통상 ‘2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이에 대해 명시적 규정이 없다 보니 ‘민생 안정’을 핑계로 묻지 마 추경이 반복돼왔다. 대량 실업의 개념도 모호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탓에 국가재정법 시행 이후 올해까지 편성된 추경은 모두 열네 차례에 이른다. 추경 요건을 명문화하기 이전 15년 동안의 추경 횟수(18회)와 큰 차이가 없다. 추경의 법적 요건이 사문화돼 ‘예산 변경이 필요한 경우’라는 과거 법 규정과 다를 바 없게 된 셈이다.

습관성 추경도 우려스러운 대목이지만 추경이 맞춤형 긴급 수혈이라는 원래 취지에서 벗어나 선심성 경기 부양책으로 전락한 것도 큰 문제다. 이번 2차 추경의 요건은 ‘사회적 재난’ 대응이지만 재난지원금을 소득 하위 80%까지 지급하는 방안과 신용카드 사용액이 많으면 일정액을 되돌려주는 ‘캐시백’이 재난 피해자 구휼에 맞지 않는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이에 앞서 정부는 2018년 미세먼지 대처를 추경 명분으로 내세웠는데 추경 실탄 6조 원 가운데 미세먼지 대책에는 2조 원만 배정했다. 전형적인 끼워넣기 추경이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2019년 1월 29일 정부세종청사에서 23개 사회간접자본(SOC) 시설에 대해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 방침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문화한 재정 규율은 이뿐만이 아니다. 대형 국책 사업에 대한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 요건도 추경처럼 정부에 과도한 재량권을 부여하고 있다. 국가재정법은 ‘지역 균형과 긴급한 경제·사회적 상황 대응 등을 위해 국가 정책으로 필요한 사업에 대해 예타를 면제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한마디로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예타 면제를 하지 못할 국책 사업이 없는 것이다. 정부가 2019년 24조 원 규모의 23개 사회간접자본(SOC) 사업에 대해 무더기로 예타를 면제한 것이 대표적이다.

재정 전문가들은 현행 국가재정법을 손질하는 정도만으로 재정 규율을 확보하기에는 근본적 한계가 있다며 강력한 구속력을 지닌 재정준칙을 담은 ‘재정건전화법’을 별도로 제정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정부가 지난해 말 ‘한국형 재정준칙’을 발표했지만 전문가들의 반응은 싸늘하다. 국회에 계류 중인 정부안은 구체적인 준칙 기준을 시행령에 담은 데다 그마저도 너무 느슨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 방안은 2016년 정부가 제출했다 폐기된 재정건전화법 제정안에 비해서도 훨씬 후퇴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2016년 안은 국가 채무 비율을 45% 이내로 제한한 반면 이번 정부안은 60% 이내로 완화됐다. 준칙 예외 조항은 추경 처럼 ‘고무줄’이 될 소지도 있다. 옥동석 인천대 경제학과 교수는 “2016년 재정건전화법을 추진할 당시 정부는 재정의 지속 가능성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다”며 “재정 상황은 더 빨리 악화되는데도 과거 안보다 헐렁한 재정준칙을 내세우는 것은 모순”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법률이 아닌 시행령으로 규율한다면 지금의 사문화한 재정 규율과 다를 바 없다”며 “독일처럼 헌법에 준하는 수준의 구속력을 부여해야 지속 가능한 재정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권구찬 기자
chan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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