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한국은행 출신 금융권 인사를 만난 자리였다. 기준금리 인상과 인플레이션 같은 딱딱한 이야기를 나누다 화제가 대선으로 향하더니 한은 차기 총재 인선으로 옮아갔다. 분위기부터 달아올랐다. 임기가 내년 3월 말로 끝나는 이주열 총재의 후임을 누가 인선해야 하느냐가 논쟁거리였다. 인사권자는 당연히 문재인 대통령이다. 한데 한은 총재 임기 종료가 권력 교체기와 맞물려 애매한 구석이 있다. 이 총재의 임기 만료일은 대선(내년 3월 9일)과 차기 정부 출범일(내년 5월 9일) 사이에 끼어 있다.
이때는 미국이 ‘테이퍼링(자산 매입 축소)’을 완료하고 통화 긴축으로 방향을 트는 분수령이 된다. 이런 중차대한 시기에 신구 권력 간에 알력을 빚거나 무관심하면 자칫 한은 총재 공백을 부를 우려가 있다. 장관은 새 정부 조각이 완료될 때까지 자리를 지키지만 한은 총재는 임기 한시 연장이 안 된다. 4년 임기제의 총재는 한은법상 후임 총재가 오든 말든 내년 3월 말 물러나게 돼 있다. 시장에서는 총재 공백 사태를 막기 위해 대선 직전과 직후 민감한 시기를 피해 조기 인선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돈다.
법과 원칙대로 하자면 문재인 대통령이 내년 3월 초쯤 차기 총재를 지명하는 게 맞다. 그래야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쳐 내년 4월 1일부터 새 총재가 통화정책의 지휘봉을 잡는 데 차질을 빚지 않는다. 박근혜 정부는 2014년 3월 3일 이주열 전 부총재를 지명했고, 문재인 정부는 2018년 3월 2일 이 총재를 재신임했다. 하지만 법보다 순리가 우선이다. 차기 총재는 4년 임기를 차기 정부와 함께한다. 가장 바람직한 시나리오는 대통령 당선자의 의견을 존중해 문재인 대통령이 지명하는 것이다. 이유는 세 가지다.
첫 번째는 순조로운 정권 이양과 신구 권력의 화합 메시지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한은 총재가 권력기관장이 아니고, 한은이 정파성에 좌지우지되는 조직도 아니다. 구태여 원칙에 얽매여 정치적 논란을 부를 이유가 없다. 인재 풀이 넓지 않아 신구 권력의 교집합도 있을 것이다. 뜻만 맞다면 총재 공백 사태를 피할 수 있다. 대통령 당선인이 후보자를 추천하고 ‘청와대 인사 검증→현직 대통령 지명→국회 인사청문회’ 등 관련 절차를 신속히 진행한다면 말이다.
두 번째는 대통령과 총재의 임기 불일치로 한은 총재의 수난사가 끊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전 정부가 기용한 한은 총재는 정부와 늘 불편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발탁한 이성태 전 총재는 이명박 정부 때 퇴진설에 시달렸다. 이명박 정부가 기용한 김중수 전 총재는 박근혜 정부와 최악의 관계였다. 임원 인사를 올려도 청와대가 무반응이라 한은이 곤혹스러웠다. 통화정책을 두고서도 외압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척 보면 척 하는’ 정도는 아니더라도 ‘따로 국밥’은 곤란하다.
세 번째는 이른바 정권 말 ‘알박기’ 논란과 이로 인한 후폭풍이 크다는 점이다. 대선 전 임명 강행은 여권에 정치적 리스크가 크다. 만에 하나 총재 후보자가 자질 논란에 휩싸인다면 대선에 돌출 악재로 작용한다. 당장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부터 들고 일어날 것이다. 대선 후 인선은 더 나쁜 선택이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가동되는 마당에 총재 인선은 싸우자는 것밖에 안 된다. 총재 후보자로서도 부담이다. ‘알박기’ 총재라는 꼬리표가 4년 내내 따라붙는다.
한은 총재는 대통령이 인사권을 행사하는 3,000여 개 자리 가운데 하나지만 여느 대통령 임명직과는 무게감이 다르다. 김대중 정부 이후 5명의 총재가 줄곧 임기를 마쳤다. 제왕적 대통령제하에 대단한 전통이다. 여기에 더해 한은 총재가 금융통화위원회 의장을 맡은 이후 첫 연임의 기록도 남겼다. 권력 교체기에 순로조운 총재 인선권 바통 체인지 역시 대단한 일일 것이다. 차기 한은 총재 인선은 신구 권력 관계를 엿볼 리트머스 시험지가 된다. 좀 더 욕심낸다면 청와대가 내년 초 한은 총재 인선을 대통령 당선인과 상의해서 결정하겠다고 먼저 밝히는 것이다. 이게 과도한 기대일까./chans@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