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 부채’ ‘자영업자 부채’ ‘비은행권 리스크’.
고승범 금융위원장과 정은보 금융감독원장이 꼽은 올해 금융 안정 관리를 위한 3대 과제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당초 예상보다 빠르게 통화정책 정상화를 추진하면서 지난 2년간 사상 최대 실적을 내는 등 양적 성장을 해온 우리 금융회사들 역시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해외 진출 등 질적 성장을 병행하지 않으면 가계와 자영업자에게 덮칠 금리 급등이라는 파도에 함께 휩쓸릴 수 있기 때문이다.
10일 금융권에 따르면 오는 14일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가 기준금리를 1.25%로 인상할 것이 유력한 가운데 미 연준도 3월부터 정책 금리를 올릴 가능성이 커지자 금융 시장이 요동치고 있다. 시장에서는 3월 중순 연준의 테이퍼링(자산 매입 축소) 종료와 금리 인상이 함께 진행되고 9월 양적 긴축이 시작될 것으로 전망한다.
국내외 금리 인상이 경로를 이탈해 한층 속도를 낼 경우 부동산 등 자산 가격에 큰 충격을 야기할 수 있다. 한은의 하반기 금융안정보고서를 보면 글로벌 금융위기처럼 주요국의 자산 시장이 동반 붕괴되면 우리 경제성장률이 -3%까지 하락할 것으로 예측됐다. 이는 -5.1%를 기록했던 외환 위기 당시와 유사한 수준이다. 한은이 금융 불균형 및 금융 시스템 복원력 관련 지표들을 반영해 산출하는 금융취약성지수(FVI)는 56.4로 나타났다. 이는 지난 2010년 이후 장기 평균 값 31.3를 크게 웃도는 수준이다. FVI가 클수록 금융 시스템이 대내외 충격에 취약하다.
2년 이상 지속되고 있는 코로나19 사태가 ‘영끌(영혼을 끌어모아)’ ‘빚투(빚을 내 투자)’를 부추긴 영향이다. 지난해 9월 말 명목 국내총생산(GDP) 대비 민간 신용(가계·기업 신용 합산) 비율은 219.9%로 집계됐다. 이에 한은은 “향후 금융 지원·완화 조치 종료, 시장 금리 상승 등에 따른 리스크에 대비해 금융기관은 선제적인 손실 흡수력 제고에 힘쓸 필요가 있다”고 주문했다. 박종규 금융연구원장은 “금리 상승에 따른 순이자마진 확대로 은행들의 전체 이익은 늘어날 것”이라면서도 “3월 중소법인·소상공인 차주 상환 유예 종료 시 대손 비용이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우려했다.
이런 우울한 전망에 따라 금융사들의 새해 경영 전략 수정은 불가피해 보인다. 금리 상승기 여신 금리는 빨리 인상하고 수신 금리는 서서히 올리는 ‘이자 장사’에 골몰하는 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리스크를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정 금감원장이 “3월 이전에라도 금융사가 충분한 대손 충당금이나 경기 대응 완충 자본을 쌓게 해 충격 흡수 능력을 보완하도록 하겠다”고 밝힌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전문가들은 자산관리(WM) 수수료 등 비이자 수익 제고 방안 없이는 대형 금융사조차 생존 자체가 불투명하다고 진단한다. 특히 올해부터 마이데이터 시대가 본격적으로 개막함에 따라 문호가 활짝 열린 WM 시장을 선점하는 곳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했다. 5대 금융 지주 최고 경영진도 이를 모르지 않는다. 김정태 하나금융 회장이 “시장은 우리를 ‘덩치만 큰 공룡’으로 보고 있다. 공룡은 결국 멸종했다”면서 위기의식을 숨기지 않은 이유다.
기업금융에서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면 인터넷전문은행 등에 완전히 잡아먹힐 수도 있다. 이미 리테일(소매) 시장은 포화 상태이며 시간이 갈수록 디지털에 강점을 지닌 빅테크(대형 정보기술 기업)들이 우위에 설 수밖에 없다. 반면 기업금융은 다르다. 은행의 축적된 노하우를 활용한 신용 평가와 리스크 관리 능력이 가장 빛날 수 있는 영역이다.
이 같은 기조 하에 윤종규 KB금융 회장은 “올해 가계대출의 성장 제한이 예상된다”며 “기업금융과 자본시장 영역에 더 힘을 모아 성장 활로를 모색할 것”이라고 말했다. 손태승 우리금융 회장은 “올해 증권 부문 등 기업 가치를 획기적으로 끌어올릴 만한 무게감 있는 비은행 포트폴리오 확대를 한층 속도감 있게 추진할 것”이라고 했다.
나아가 종합 기업금융 플랫폼을 구축하는 것도 기존 성장 방식의 한계를 타개할 수 있는 돌파구 중 하나로 거론된다. 빅테크의 금융업 진출에 대응할 전통 금융사만의 무기가 될 수 있어서다. 조용병 신한금융 회장은 “고객은 이제 금융사의 규모와 수익이 아닌 경험의 가치에 따라 움직인다”며 “그룹사의 디지털 플랫폼 전반을 ‘바르게, 빠르게, 다르게’ 운영해 빅테느나 플랫폼 기업과의 경쟁에서 앞서 나가자”고 독려했다.
글로벌 영토를 넓히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2010년 128개에 불과했던 국내 은행의 해외 점포 수는 2020년 말 197개로 증가했다. 하지만 총자산과 순이익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6%대로 여전히 한 자릿수에 그치는 실정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금융사 관계자는 “아시아 시장의 집중도(70%, 신남방 43%)가 높은 만큼 지역 편중 리스크에 노출될 수 있다”면서 “선진국·중동·아프리카 등으로 진출하는 등 지역 다변화가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이어 “가스·유전 탐사 개발, 신재생에너지 프로젝트, 항만 개발 및 인프라 투자 등 금융과 산업이 함께 성장할 수 있는 분야에 금융 솔루션을 제시하는 역량을 갖춰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