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김새는 유럽인에 가깝지만 북아프리카 사람들과 흡사하게 행동하는 이들. 스스로 '자유로운 사람' '고귀한 사람'이라는 뜻의 '이마지겐(Imazighen)'로 규정하는 사람들. 1,000만명이 넘는 인구에도 단일 국가를 형성하지 못한 채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베르베르족 이야기다.
책 '베르베르 문명'은 북아프리카 마그레브(Maghreb) 토착 민족인 베르베르 부족의 역사와 문화를 조명한다. 리비아와 튀지니, 알제리, 모로코 등 아프리카 북서부 일대를 총칭하는 마그레브는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유럽과 중동, 사하라사막을 경계로 아프리카 대륙과 맞닿은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수천 년 간 온갖 문명이 교차했고, 지금도 ‘다양성’이라는 가치가 살아 숨 쉬는 곳이다. 저자는 국립 알제리대학교 교수를 지내는 등 수십 년 간 유럽과 알제리를 오가며 베르베르족을 연구해 왔다.
지중해 문명과 아프리카 대륙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해온 베르베르 부족은 주변의 수많은 이민족이 마그레브 지역을 침입했고, 끊임없는 위협 속에 중간자적 위치로 겨우 그들만의 전통과 관습을 유지해오고 있다. 파편화된 정체성은 베르베르인들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다. 이들은 비영토성이라는 특성 아래 유럽과 중동, 아메리카에 걸쳐 공동체를 형성한다. 대표적으로 프랑스가 알제리를 식민 지배하던 시절 마그레브에서 프랑스로 대거 이주가 이뤄지면서 오늘날 프랑스에는 스스로를 '마그레뱅'이라고 부르는 마그레브 이민자 600만 명 이상이 살고 있다. 이 가운데 200만 명이 베르베르어를 사용한다. 종교적으로도 이슬람교가 압도적이긴 하지만 미그레브 지역에는 기독교와 유대교, 러시아정교회까지 다양한 종교가 공존한다. 마그레브 지역의 이슬람 소수 종파인 이비디즘은 자유와 평등을 내세우기도 한다.
늘 역사의 주변부에 머물렀던 베르베르 문명은 지금껏 설명되지 않았다. 베르베르족은 미국, 유럽 등에서 테러가 발생할 때마다 아랍권으로 묶여 인식되는 정도였다. 그런데 왜 지금 이 낯선 이민족의 문명에 주목해야 할까. 책은 그간 아랍·이슬람으로만 인식돼 온 베르베르인들이 형성해 온 역동적이고 창의적인 문화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역사의 그 어느 때보다 소수자의 목소리를 들으려 애쓰는 시대에 베르베르 문명에 주목하는 작업은 자연스러운 시대의 흐름이면서 동시에 인류의 책무이자 지향점”이라고 말한다. 2만4,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