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대형 시중은행에서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임직원끼리 사석에서 만나면 ‘채널’을 묻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지난 1997년 외환위기를 거치며 당시 대형 은행 여러 곳이 합병을 해 탄생한 이 은행에서는 합병 전 A 은행 출신이면 1채널, B 은행 출신이면 2채널, C 은행 출신은 3채널 인사로 통용이 됐다. 가령 처음 만나는 직원끼리 식사를 할 때 “00 차장은 몇 채널이야?”라고 물으며 ‘족보’를 확인했다.
이는 국내 대형 은행 내부의 파벌, 순혈주의, 폐쇄된 조직 문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하지만 공고했던 대형 시중은행의 순혈주의에 최근 들어 금이 가고 있다. 임직원의 족보를 따지기보다는 경쟁사 인사까지 디지털 임원에 앉히고 정기 공채는 줄이는 대신 디지털 전문가는 상시 채용하고 있다.
한 은행 관계자는 “몇 년 전까지는 은행 공채 출신, 합병 전 특정 은행 출신이 아닌 인사가 금융지주 임원이 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며 “하지만 이제는 디지털 부문을 중심으로 외부에서 영입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또 과거에 디지털이 중요하다고 말은 많았지만 그래도 금융지주 회장 주재 계열사 최고경영자(CEO) 회의에서 디지털 담당 임원은 회의 제일 마지막에 잠깐 보고만 하는 수준이었다”며 “그러나 최근에는 회의 초반에 비중 있게 발표를 하며 위상이 180도 달라졌다”고 설명했다.
실제 금융지주가 ‘디지털’에 사활을 거는 것은 금융지주의 한 해 경영 전략을 한눈에 보여주는 지주 회장 신년사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서울경제가 KB·신한·하나·우리·NH농협 등 5대 금융지주 회장의 올 신년사 키워드를 분석한 결과 ‘디지털’이라는 단어는 총 33번이나 언급이 됐다. 손태승 우리금융지주 회장이 10번 언급하며 가장 많았고, 김정태 하나금융지주 회장이 9번으로 뒤를 이었다. 나아가 금융지주 회장들은 ‘플랫폼’에 대한 언급도 많았다. 신년사에서 총 20번을 언급했다. 윤종규 KB금융지주 회장이 이 중 9번이나 말해 제일 중요성을 강조했다.
특히 대형 금융지주를 멸종한 ‘공룡’에 비유한 신년사로 화제를 모은 김 회장의 경우 현재의 난관을 돌파하는 해법으로 디지털을 들기도 했다. 김 회장은 “시장은 우리(대형 금융지주)를 ‘덩치만 큰 공룡’으로 보고 있고 공룡은 결국 멸종했다”며 “디지털 전환이라는 구호의 나열로 그칠 것이 아니라 그룹의 디지털 핵심 기반부터 재설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렇듯 금융지주가 디지털에 사활을 건 것은 금융의 빠른 디지털화, 빅테크의 공습 등에 대한 위기의식 때문이다. 은행 업무를 본다고 점심시간에 점포를 찾는 것은 옛말이 됐고 휴대폰으로 간편하게 업무를 보는 것이 일상이 됐다. 이런 상황에서 고객이 알아보기 어려운 유저인터페이스(UI), 복잡한 인증 절차 등을 유지했다가는 쉽게 고객을 경쟁사에 빼앗길 수밖에 없다. 특히 네이버·카카오·토스 등은 직관적인 UI와 고객 입맛에 맞는 서비스를 무기로 금융업에 대한 공습을 이어가고 있다. 빅테크는 금융지주가 만든 금융 상품을 자사의 플랫폼에서 고객에게 판매하려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어 이 같은 플랫폼 경쟁에서도 밀릴 경우 금융지주는 단순히 금융 상품을 제조만 하는 ‘하청 업체’로 전락할 수 있다.
이에 각 금융지주는 일제히 디지털 관련 부서 확대와 외부 영입 등을 추진하고 나섰다. KB금융은 지난해 말 조직 개편에서 디지털플랫폼총괄(CDPO) 산하 ‘디지털콘텐츠센터’를 만들어 고객에게 제공되는 콘텐츠를 업그레이드하는 역할을 맡겼다. 또 플랫폼 품질 관리 전담 조직인 ‘플랫폼QC 유닛’도 신설했다. 지난해 초에는 경쟁사인 신한DS의 조영서 당시 부사장을 영입했고 현재 CDPO 직을 맡기고 있기도 하다.
하나금융지주 핵심 계열사 하나은행 역시 지난해 말 조직 개편에서 디지털리테일그룹 내에 ‘디지털전환(DT) 혁신본부’를 신설했다. 성공적인 디지털 전환의 핵심 기반인 △인재 △기술 △조직 △기업 문화의 혁신을 통해 시장 선도적인 플랫폼 비즈니스 모델을 구현하고 개방형 생태계를 확대하는 데 기여할 예정이다.
우리금융 계열사 우리은행도 마이데이터 사업 전담 부서인 ‘마이데이터 사업부’를 새롭게 만들었고 혁신기술사업부를 신설해 메타버스·블록체인 등 새로운 기술과 금융의 결합을 추진하고 있다. 농협은행 역시 디지털플랫폼부문과 데이터부문을 신설하고 은행장 직속에 DT전략부를 새롭게 만들었다. DT전략부는 디지털 신사업 발굴부터 이행 관리, 평가까지 디지털 전략을 총괄하고 연구개발(R&D) 기능을 맡는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금융사에 디지털 전환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기 때문에 앞으로도 관련 조직은 빠르게 확대될 것”이라며 “외부 영입 등 그동안 금융사에 ‘금기’로 여겨졌던 것을 파괴하는 일도 잦아질 것”이라고 예고했다.